<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김주혜 ,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주해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친환경 생활과 생태문학을 다루는 온라인 잡지 <피스풀 덤블링>의 설립자이자 편집자다.
한국이라는 작은 땅의 역사를 장대한 스케일로 펼쳐낸 #장편소설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은 6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이다.
#프롤로그 - 사냥꾼
1917년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처음으로 해가 떠오르기 전 태초의 시간 같았다. 구름은 그들이 속해 있던 영역을 떠나 나지막이 내려와, 마치 땅에 맞닿은 듯 보였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창공을 둘러싸고 어렴풋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흔들림도 소리도 없었다. 이 아득한 세계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눈길에 난 작은 얼룩처럼 사람 하나가 홀로 걷고 있었다. 사냥꾼이다. 아직 부드러움과 온기가 남아 있는 짐승의 발자국 위로 몸을 구부린 채, 남자는 자신이 노리는 사냥감이 있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눈의 날카로운 냄새가 폐를 가득 채웠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약간의 눈이 내려 쌓이면 그 짐승을 더욱 쉽게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국 크기로 미루어 제법 큰 표범 같았다.
17p-2
1부 1918년~1919년
정호는 그게 다 무슨 이야기인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주위의 많은 사람이 눈물에 젖어 황홀한 얼굴인 것을 보았고, 그 자신의 눈에서도 뜨거운 물기가 차오르는 것에 놀랐다. 정호는 단 하루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그가 지금 이해한 것은, 세상이 그의 가족과 한 무리의 거지 소년들뿐 아니라 그곳에 서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절박하리만치 어둡고 슬픈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 모두가 공유한 고통이 한 심장의 박동처럼 정호의 온몸을 울렸다. 연설을 마치자, 연사 학생은 깃발 하나를 높이 들었다. 하얀 깃발 중앙에 빨갛고 파란 원형 무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한 독립 만세!" 학생이 소리쳤다. 그 최초의 만세 소리에 뒤이어, 온 군중이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외치기 시작했다.
196p-21
20장 #몽상가들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몽상가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본다.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한 죽 한 그릇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겹의 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람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이는 결코 지능이나 열정의 차이로 결정되는 자질이 아니다. 이 두가지는 몽상가의 타고난 자질과 가장 자주 혼동되는 것들이다.
415p-2
3부 1941년~1948년
아무도 듣는 이 없이 자신의 말소리가 공허하게 흩어져 버리는 걸 느끼며 옥희는 어쩐지 버즘나무의 하얀 씨앗들을 떠올렸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오묘한 방식으로 비추어 내릴 때마다 마치 공중을 떠다니는 별처럼 반짝이던 그 솜털 같은 씨앗들, 바람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부는데도 그 씨앗들은 모두 단호하게 제각기 다른 길을 택해 사방으로 나부끼며 날아갔다. 언젠가 옥희는 그것들이 땅바닥까지 내려오는지 꽤 오랫동안 집중해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개도 온전히 떨어지지 않은 채, 그 모든 씨앗은 하늘과 땅 사이의 하염없는 공간을 계속 둥실둥실 떠다닐 뿐이었다.
480p-14
4부 1964년
한참이나 그걸 바라보던 나는, 정호가 아직도 나를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저세상에 가서도 말이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있을 거라는 것도, 삶을 계속 놓아주고 또 붙잡고 버티면서, 오직 바다에서 온 나의 일부만이 남을 때까지.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나는 진주를 옷 가방에 넣고 물가로 걸어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원한 청색 파도 사이를 둥실둥실 부유했다.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소망도 동경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603p-3
1917년 평안도 깊은 산속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평양을 거쳐 경성 그리고 마지막 1964년 제주까지
삼천리 금수강산이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근역강산맹호기상도" 처럼 웅장하게 펼쳐진 역사이야기 <작은 땅의 야수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표현한 "설원의 호랑이"가 2025년 새해에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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