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1부
내가 물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내게 그러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 기술을 하룻밤 새에 배운 척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후디 사부는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세인트루이스의 길거리에서 푼돈을 구걸하고 있던 고아인 나를 찾아냈고, 그 뒤로 3년 동안 꾸준히 가르친 다음에야 내가 사람들 앞에서 묘기를 보이도록 허락했다. 그것은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대서양을 처음 횡단 비행한
찰스 린드버그가 이름을 날렸던 1927년, 전세계에 영원한 밤이 내리기 시작한 바로 그 해였다.
7p-1
「이 아이는 이솝이다.」사부가 내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아이지. 얘한테 인사해라, 월트, 그리고 손을 잡아 흔들어.
아이는 네 새형이 될 거다.」
「난 검둥이 하고는 악수 안 해요. 내가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아저씨는 미친 거라고요.」
예후디 사부가 요란스럽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혐오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슬픔의 표현,
그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떨려 나오는 한숨이었다
22p-15
「분명히 얘기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다. 네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건 네 앞에 놓여 있는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새들은 고통을 받지 않아요. 그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른 다고요. 만일 나한테 사부님이 얘기한 것 같은
재능이 있다면 그 일이 왜 쉬워서는 안 되는지 알 수가 없는데요?
「그건 말이다. 이 바보 녀석아, 너는 새가 아니라 사람이라서지, 너를 땅 위로 올리기 위해서 우리는 하늘을
두쪽 내야 돼, 망할 놈의 온 우주를 뒤집어야 한단 말이야」
57p-21
2부
그날 밤 우리는 사부의 소유지에 두 사람을 묻었다. 외양간 옆의 십자가도 없는 구덩이에 그들의 시체를 내렸던
것이다. 우리는 뭐라고든 기도를 해야 옳았지만 그러기에는 가슴이 흐느낌으로 너무 들먹이고 있어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중에 아무 말 없이 흙으로 그들을 덮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심지어는 우리의 소유물 중에 아진 온전한 것이 남아있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짐마차에 말을 매어 시볼라를 영원히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떠났다.
135p-1
그러는 동안 내 정신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하루에 한 시간씩 원더보이 월터로 바뀌는
아이 월터 롤리가 아니라 공중에 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인 철두철미한 원더보이 월트로
바뀌어 갔다. 땅은 일종의 환상, 음모와 망령들이 깔린 위험한 지대였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 또한
모두 거짓이었다. 이제는 단지 공중만이 현실이어서 하루에 스물세 시간 동안 나는 예전의 즐거움과 습관으로부터
격리된 채, 절망과 두려움에 질린 포로가 되어 나 자신에 대한 이방인으로 살고 있었다.
195p-22
하지만 사부는 내 말을 들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내 눈을 들여다보며 그는 권총을 들어올려 머리에 대고 공이치기를 뒤로 당겼다. 그는 마치 내가 말릴까 봐, 내가 손을 뻗쳐 총을 움켜쥘까 봐 두렵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움질일 수가 없었다. 그대로 앉아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고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눈길만은 여전히 확고하고 뚜렸했다.
「좋았던 시절들을 기억해라.」그가 말했다. 「내가 너한테 가르쳤던 것들을 기억해.」
그런 다음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눈을 감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301p-20
3부
「네가 나를 기억했을 때 거덜이 나 있다면 교환수에게 전화요금을 수신자 지불로 해달라기만 하면 돼.」
하지만 나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나는 그 명함을 잘 간수할 셈으로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지만 그날 밤 침대로
가기 전에 그것을 찾았을 때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점심식사에 바로 뒤이어 바지를 급히 잡아당기고
끌어내렸던 것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된 일인지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 명함은 틀림없이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고, 객실을 치우는 여자가 이미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 넣지 않았다면
로열파크 호텔 409호실 바닥에 떨어져 있을 것이다.
341p-10
4부
내심으로 나는 몸을 띄워 올려 공중에서 떠다니는 데 어떤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고는 믿지 않는다.
남자건 여자건 아이이건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내면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집중만 한다면 누구라도 내가 원더보이 월트로서 달성했던 것과 똑같은 위엄을 다시 이루어낼 수 있다.
물론 그러러면 당신 자신이기를 멈출 줄 알아야한다. 그것이 출발점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당신은 자신을 증발시켜야 한다.
399p-20
공중 부양하는 소년의 이야기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삶으로 변신하며 펼쳐진다.
그리고 현기증을 느낄 만큼 높이 올라갔다 떨어지고 나서 느끼는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주인공을 만난다.
소설이라는 이야기 속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멋진 작가 폴 오스터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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