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시집
오늘 다시 태어나는 빛에게
흑곰을 위한 문장
흑곰에 대해서 쓴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쓸 수 없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에 . 이를테면 흑곰의 마음 같은 것. 마음을 대신하는 눈길 같은 것. 눈썹 끝에 맺혀 떨어지는 눈물 같은 것. 머나먼 북극권으로 사라지는 한 줄기 빛 같은 것. 한줄기 빛으로 다시 시작되는 오래전 아침 같은 것. 산더미만 한 덩치에 보드랍고 거친 털옷을 입고 있습니다.
······
10p
<어제와 같은 거짓말을 걷고>
······
종일 문을 연다는 것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생각 지수는 행동 지수에 반비례 한다. 어제의 발걸음 위로 또 다른 발걸음이 겹쳐 흐른다. 어두워지면서 되살아나는 얼굴을 만들어 낸다. 어제와 같은 거짓말을 걷고 있다. 지속되는 걸음을 막을 수는 없다.
41p
<떨어진 열매는 죽어 다시 새로운 열매로 열리고>
······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감각하는 법을 교육받았습니다.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은 결국 자기자신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약속이 은밀한 방식으로 유통되고 있습니다. 정확한 대안을 찾을 때 현실은 과거처럼 생생해집니다. 빛과 그림자가 혼합된 백일몽의 연속이다. 너는 죽은 나무 아래에서 잠들었고 향은 여전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떨어진 열매는 죽어 다시 새로운 열매로 열린다. 마지막 페이지는 극락정토라고 적혀 있었다.
47p-15
<꿈과 현실의 경계로부터 물러났고>
······
본래의 자아란 없기 때문이다. 불변하는 존재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공유하지 못한 채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현재를 깨달아야 합니다. 더 깊게 호흡할 생각입니다. 오래된 미래의 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독자적인 발성을 익힌다. 독자적인 발상을 지속한다. 나의 무덤은 너의 현실이다. 너의 현실은 나의 꿈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도 다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로부터 나아간다. 내면의 축제를 시작한다.
57p-3
<하얗게 탄 숲>
······
말을 하기엔 너무 환한 숲이었다. 한 마디 위에 한 마디를 얹기엔 하나 하나의 말이 너무 하얀색이었다. 하나와 하나 사이로 비탄과 감탄과 괴로움과 서러움이 흐르고 있었다. 먼지를 털듯 마음을 털고서 하나가 일어났다. 하나의 마음을 지우자 마음의 바다도 사라졌다. 마음의 바다가 사라지자 마음의 깊이도 사라졌다. 하얗게 탄 숲을 하나 하나 떠나가고 있었다. 하나 하나 떠나가면서 붉게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103p-2
<피라미드와 새>
······
너와 나의 비밀은 모서리부터 닳아가면서 다시 태어난다. 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날개 없이도 날아갈 수 있습니다. 꼭대기로부터 빛을 받아 흘러내리는 것을 너는 피라미드라고 불렀다. 그 곁으로 반짝이며 날아가는 그림자가 하나 있어 새는 매로부터 달아난다.
105p-7
<발화 연습 문장 - 어떤 고요함 속에서 곡예하는 사람을 위한 곡을 만드는 사람을 떠올리는 밤>
······
너는 한밤중 문득 깨어나 곡예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곡예하는 사람은 어떤 이미지로서 너를 사로잡는다. 한계 상황으로 너를 밀어 넣는다. 곡예는 지난한 침묵을 요구한다. 곡예는 지극한 집중을 요구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얼마나 온전히 남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너는 세계라고 부를 만한 시간과 장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너는 네가 있었고 네가 있어야만 하는 시간과 장소를 알지 못한다.
······
132p-12
해설 - 목소리의 탄생
시인의 시를 읽었다. 제목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흘려쓴 이야기가 무척이나 독특하게 읽힌다.
시인의 말처럼 "발견해 주기만을 기다려 주면서 홀로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는 달빛처럼 항상 거기 있지만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시인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표현한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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