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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덕과 신하의 법은 둘이 아니다!

임금의 덕과 신하의 법은 둘이 아니다!

  이미지는 그림자이다. 후덕한 임금과 대쪽같은 신하, 우리에게 퍽 친숙한 이미지이다. 반대로 대쪽같은 임금과 후덕한 신하는 어떤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그러면, 후덕하면서 대쪽같은 임금과 역시 대쪽같으면서 후덕한 신하는 어떤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렇듯 임금의 이미지와 신하의 이미지가 알게 모르게 고정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선우후락(先憂後樂)의 사대부적 자아를 지닌 보편적인 인간이 임금이냐 신하냐 하는 직분에 따라 선택적인 이미지를 부여 받은 이유가 있는 것일까? 홍석주(洪奭周, 1774~1842)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한 임금과 신하의 이미지에 도전한다.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옛날에는 옥사를 처단함에 윗 사람은 살리기 좋아함을 덕으로 삼고 아랫 사람은 법을 집행함을 직분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요(堯)는 세 번 용서하라 하였고 고요(皐陶)는 세 번 죽이라 하였다. 정말이지 이는 소씨(蘇氏)의 억설1)이다. 요와 고요의 실상이 아니다. 살리기 좋아함은 본디 인군(人君)의 덕이다. 유사(有司)는 본디 임금의 덕을 펼침으로써 백성에게 이르게 하는 자이다. 인군에게 살리기 좋아하는 덕이 있는데 유사된 자가 도리어 가로막아 행하지 못하면 옳겠는가? 인군에게 덕이 되는 것과 유사에게 직분이 되는 것, 그 도가 둘인 적은 없었다. 각각 이치에 합당하게 할 뿐이다. 만약 이치로 보아 죽는 것이 합당하다면 비록 인군이 살리기 좋아한다 하더라도 어찌 이치를 어기며 살릴 것이며, 만약 이치로 보아 죽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면 이치가 있는 곳이 법이 있는 곳이니 법을 집행하는 자가 다시 어찌 죽일 것인가? 소씨의 말대로라면 이는 역적질한 신자(臣子)나 사람을 죽인 도적에게도 요가 모두 차마 법을 가하지 못한다는 것이며, 뚜렷한 근거 없이 악행의 오명을 쓴 자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행을 행한 자에게도 고요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어찌 요와 고요라 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리라. 이를 일러 죄의(罪疑)2)라고 한다. 죄가 의심스러우면 형을 가볍게 하라 했으니 유사가 감히 독단할 바가 아니다. 아아! 이는 후세 인신(人臣)이 혐의를 피하고 스스로 편하게 하려는 설이고, 인군이 영예를 구하고 아름다움을 독점하려는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다. 성세(聖世)에 이런 일이 있었는가? 요는 대성인이다. 고요도 성인의 무리이다. 의심스러워도 합당함을 얻지 못했다면 어찌 족히 성인이라 하겠으며, 이미 합당함을 얻었다면 요의 합당함이 곧 고요의 합당함이다. 어찌 요에게는 용서해야 합당한데 고요에게는 죽여야 합당한 것이 있겠는가? 요가 마음 속으로는 용서함이 합당하지 않은 줄 알면서도 용서한다고 말했다면 이는 빈 말로 은혜를 파는 것이다. 고요가 마음 속으로는 죽임이 합당하지 않은 줄 알면서도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면 이는 아름다운 이름을 임금에게 귀결시켜 아첨하면서 자신은 온 천하를 각박함으로 통솔하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도 옳지 않다.
  더구나, 죄가 의심스러운 자에게 형을 가볍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나는 성군이 위에 있는데 합당하지 않은 정치가 있음을 들은 적이 없다. 만약 가볍게 해야 합당하다면 유사된 자가 임금을 인도해 그렇게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임금이 용서하기를 원하는데 유사가 기꺼이 따르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임금의 아름다움을 막고 임금에게 불인(不仁)을 말하는 것이다. 다행히 인군이 모두 요와 같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후세의 인신은 무고한 사람이 형장에서 처형됨을 좌시하기만 하고 감히 한 마디도 발언하지 않는다는 것이 반드시 이 말일 것이다.
  아! 그 또한 인자(仁者)의 말이 아니로다. 그러면, 옛날 어진 재상이 ‘은혜는 자기한테 나오기를 원하지만 원망은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라고 했던 말이 아닐까? 아! 이는 쇠세(衰世)의 신하가 시극(猜克)의 임금을 섬기면서 하는 일이다. 인신이 되어 자기를 온전히 하고 화를 멀리 피할 계책으로는 좋지만 인주(人主)의 복은 아니다. 무릇 인주가 위에서 단정히 두 손을 모으고만 있으면 사해의 사람들이 모두 덕으로 돌아가지 않음이 없어서 집집마다 은혜로 여기고 사람들마다 은혜로 여기는데 어째서일까? 공경대신(公卿大臣)과 온갖 집사(執事)들이 분주히 사방을 다니며 임금의 인덕을 펼치는 것을 자기 일로 삼지 않음이 없어서, 사방의 백성들이 그 은혜를 받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백성들이 그 은혜를 받지 않음이 없어야 인주가 치평의 복을 누리는 것이다. 만약 반드시 공경대신과 온갖 집사들에게 모두 백성에게 은혜를 보이는 것을 하지 못하게 금지하고, 인주가 일일이 몸소 직접 하게 한다면, 저녁에도 식사를 하지 못하고 밤중에도 잠들지 못할 것이니, 그 형세가 반드시 사방에 두루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인군이 번거롭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고를 해도 백성이 덕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반드시 이 말일 것이다.
  혹자는 말하리라. 소씨의 설은 참으로 틀렸다. 그러나, 그 설의 근원이 『예기(禮記)』에 있다. 『예기』에서는 “공족(公族)에게 죽을 죄가 있어 유사가 ‘아무개의 죄가 사형입니다.’라고 공에게 아뢰면, 공은 ‘용서하라’고 말하고, 유사가 다시 ‘사형입니다.’라고 아뢰면, 공은 다시 ‘용서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 번째 용서하라는 말에도 따르지 않고서 밖으로 나가 전인(甸人) 사이에서 사형을 집행하려 한다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그래도 반드시 용서해 주라’고 한다. 그러나 유사는 끝내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무릇 공족은 본디 인군이 의당 친친(親親)의 은혜를 가해야 하는 사람이다. 비록 법을 굽혀 용서해도 좋지 않은가?
  이는 본래 주관(周官)에서 의친(議親)하는 뜻이다. 그러나, 의논해서 용서할 만한 것이 있고 의논해서 용서하지 못할 것이 있다. 의논해서 용서할 만한 것은 죄가 가벼워 은혜로 법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의논해서 용서하지 못할 것은 죄가 무거워 은혜로 의를 가릴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지당한 천칙(天則)이 존재하는 것이니, 의가 있는 곳을 인군이 어찌 사의(私意)로 가릴 수 있겠으며, 은혜를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을 유사가 어찌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공족은 일반 사람과 다르니 세 번 용서하는 은혜가 있어도 오히려 괜찮다. 생각건대 세 번이나 용서하라 했는데 대답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전인들 사이에서 형을 집행하게 한 것은 그 잘못이 또한 심하다. 무릇 살리고 죽이는 것은 천자의 큰 칼자루이다. 조예(皂隸)나 필서(匹庶) 같은 천인도 어명을 기다려 죽이는데 하물며 공족이랴!
  환온(桓溫)이 사마혁(司馬奕)을 폐위시키고 간문제(簡文帝)를 세운 다음 무릉왕(武陵王) 사마희(司馬晞)가 죄가 있다고 꾸며내 죽일 것을 청했다. 간문제가 허락하지 않자 환온이 굳게 청하니 간문제가 마침내 손수 조서를 지어 이렇게 전했다. ‘만일 진의 운수가 영원하다면 의당 전조(前詔)를 봉행해야 한다. 만약 대운이 떠났다면 현로(賢路)를 피하기를 청한다.’ 환온은 두려워 땀흘리며 감히 다시 말하지 못했다. 환온의 강성함으로도 진(晉) 간문제에게 감히 행하지 못했는데, 삼대에 이런 일이 있었을까? 공족을 제거해서 불령한 시도를 이루려는 후세의 간흉한 신하가 이 설을 얻어 핑계거리로 삼으니 그 화가 다시 이루 다할 수 있겠는가? 만약 임금이 본디 죽이려고 하는데 다만 차마 자기가 먼저 죽이자고 할 수 없어 우선 유사가 하는 말을 들어 보려고 했을 뿐이라면, 이는 밖으로는 차마 하지 못하는 은혜를 보여주고 몰래 유사에게 대신 죽이게 시키는 것이다. 참되지 않음 중에 이 보다 큰 것이 무엇일까? 옛말에 ‘의지보다 참혹한 무기는 없으며 막야(鏌鎁)의 명검은 아래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죽이려는 생각을 하면서 입으로 우선 용서하라 했다면 이는 참혹함이 칼을 쥔 것보다 심한 것이다.
  그러면, 『예기』는 믿을 것이 못 되는가? 이것은 「문왕세자(文王世子)」 편에 보인다. 무왕몽령(武王夢齡)3)의 황당함과 주공천조(周公踐阼)4)의 거짓됨이 모두 이 편이다. 『예기』에서 믿을 수 없는 것이 이 편처럼 심한 것도 없다. 오호! 후세의 유자가 성인의 생각을 얻지 못하고 가볍게 들은 바를 믿어 학설을 짓는다면 만세가 되도록 전해지는 재앙이 많을 것이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1) 소씨(蘇氏)의 억설 : 소식(蘇軾)의 글 「형상충후지지론(刑賞忠厚之至論)」을 가리킨다. 이 글에서 소식은 “전에 이르기를 상을 내릴 때는 의심스러워도 주는 쪽으로 따르는 것은 은혜를 넓히기 위함이다. 벌을 줄 때는 의심스러우면 내리지 않는 쪽으로 따르는 것은 형벌을 신중하게 하기 위함이다. 요가 있던 당시에는 고요가 옥사(獄士)가 되어 사람을 죽이려 하는데 고요는 죽이자고 세 번 말했지만 요가 용서하자고 세 번 말했다. 그리하여, 천하는 고요가 굳건하게 법을 집행함을 두려워하였고, 요가 관대하게 형벌을 사용함을 즐거워하였다.(傳曰賞疑從與,所以廣恩也, 罰疑從去,所以慎刑也. 當堯之時,皋陶為士,將殺人,皋陶曰殺之三,堯曰宥之三,故天下畏皋陶執法之堅,而樂堯用刑之寬.)”라고 하였다.
2) 죄의(罪疑) : 『서(書)』 「대우모(大禹謨)」에 “죄가 의심스러우면 형을 가볍게 하고, 공이 의심스러우면 상을 무겁게 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느니 법대로 하지 않는 잘못을 한다. (罪疑惟輕 功疑惟重 與其殺不辜 寧失不經)”는 구절이 있다.
3) 무왕몽령(武王夢齡) : 『연천집』의 원문은 문왕몽령(文王夢齡)인데, 몽령은 일반적으로 무왕몽령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원문은 무왕몽령의 오기로 판단하였다. 『예기』「문왕세자」에 따르면, 주 무왕이 천제로부터 구령(九齡)을 받는 꿈을 꾸었는데, 주 문왕은 구령의 뜻을 나이, 곧 90세로 해석해 주었다. 문왕 자신은 100세를 살고 무왕은 90세를 살텐데 자신이 세 살을 주겠다고 하였고, 그 결과 문왕은 97세, 무왕은 93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4) 주공천조(周公踐阼) : 주공이 보위에 올랐다는 뜻이다. 주공은 주 무왕의 아우로 주 무왕을 도와 은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예기』「문왕세자」에 따르면 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주공은 성왕이 너무 어려서 천하가 분열될까 염려하여 보위에 올라 성왕을 대신해 정사를 섭행하고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 홍석주 (洪奭周) 「삼유변(三宥辨)」, 『연천집(淵泉集)』

※ 이 글의 원문텍스트는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93집《연천집(淵泉集)》권25, 잡저(雜著),〈삼유변(三宥辨)〉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 春香傳圖(경희대학교박물관소장)

  『심리록(審理錄)』에는 영덕(盈德) 지역 김득손(金得孫)의 옥사가 실려 있다. 1797년 김득손이 객상(客商) 전만수(全萬水)가 어떤 여인과 간통하는 것을 보고 몹시 구타하였고 끝내 칼부림을 해서 살인했다는 사건이다. 사건의 실인(實因)은 구타와 자살(刺殺)로 기록되었는데, 김득손은 구타는 인정하고 칼부림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형조에서는 목격자의 증언을 들어 김득손을 살인 사건의 진범으로 보고 정조에게 계사(啓辭)를 올렸다.

  하지만, 정조의 판부(判付)는 형조의 예상과 달랐다. 살인 사건의 실인이 구타인지 자살(刺殺)인지 확정되지 못한 애매한 상태였고, 목격자의 증언은 구타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시신의 칼자국으로는 남에게 찔린 것인지 스스로 찌른 것인지가 판별되지 않았다. 정조는 철저한 재조사를 지시했다. 그러자, 칼에 찔린 것이 분명하다는 본도의 계사와 스스로 찌를 가능성이 높다는 형조의 계사가 올라왔다. 이에 정조는 최종적으로 김득손을 풀어주라는 판부를 내렸다. 초검(初檢)의 검장(檢狀)에서 상처의 상하와 크기가 명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에 대한 분석이 의미가 없으며, 무엇보다 전만수가 왜 사망했는지 여전히 실인이 정해지 않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크게 두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실인이 정해지지 않으면 문안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고 문안이 갖추어지지 않은 옥사는 논단할 수 없다는 것. 둘째, ‘죄의유경(罪疑惟輕)’의 정신을 유념하여 의심스런 옥사는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펴서, 법을 집행하는 뜻보다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라는 것. 여기서 죄가 의심스러우면 형을 가볍게 한다는 ‘죄의유경’의 정신은 정조대 형정의 기본적인 원칙으로 강조된 것이어서 주목된다. 말하자면 살리기를 좋아하는 임금의 덕과 법을 집행하려는 신하의 직분 사이에서 임금의 덕이 더 중시된 것이다.

  이것은 일견 태평성대의 왕정으로 비칠 수도 있다. 힘 없는 소민들이 임금의 덕을 받아 서슬 퍼런 법의 집행에서 벗어나는 단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춘향을 구한 것은 바꾸어 말하면 임금의 덕이 소민을 구한 쾌거로 기억될 일이다. 이도령은 임금의 덕의 메신저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홍석주는 임금의 덕과 신하의 법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위태롭게 보았다. 임금의 덕과 신하의 법으로 정치 문화가 이원화되면서 갈수록 임금은 덕에 집착하게 되었고 갈수록 신하는 법에 집착하게 되었다. 급기야 신하는 임금을 배제한 가운데 임금의 친족에게까지 법을 집행하려고 하고, 임금은 신하를 배제한 가운데 자기 혼자 덕을 펼치려고 하였다. 임금을 배제한 신하의 법은 사욕일 뿐이고 신하를 배제한 임금의 덕 역시 사욕에 불과할 뿐인데, 임금의 덕과 신하의 법 사이의 간극이 점점 커져만 간다. 혼탁한 세상에서 덕과 법은 더러 임금과 신하의 위선적인 가면이 되고 더러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경쟁하는 도구가 된다. 정치의 공공성은 실종되고 만다.

  홍석주가 제기한 문제는 어느 의미에서 정조 이후 조선 정치사의 비극을 설명하는 단서가 된다. 힘 없는 소민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법을 굽혀 은혜를 베푸는 임금의 ‘인정’이 아니라 법을 통해서 덕을 펼치는 군신의 ‘정치’였다. 덕과 법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법이 없는 덕과 덕이 없는 법의 양극단은 해소되어야 한다. 임금과 신하는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임금의 덕이 신하의 덕을 통해 소민에게 미쳐야 하고 신하의 법이 임금의 법을 통해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정치’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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