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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쇠옹(不衰翁)의 천주교 비판

불쇠옹(不衰翁)의 천주교 비판
  민주화의 훈풍이 이 땅을 덮을 때부턴가. 젊은이들의 주장이 강해지면서 어른들은 점점 더 눈치를 보며 할 말을 제대로 못해온 듯하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부터 확인한 다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차츰 알아가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젊은 혈기가 앞설 때는 나를 알고 이웃을 알고 나아가서 세상을 알 여유가 없이 대뜸 자기가 믿고 싶은 것부터 받아들이기 쉽다. 세상을 새롭게 변혁하는 젊은이들의 패기도 좋지만 격한 젊은이들을 타이르고 꾸짖어 안돈하는, 노성한 어른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된다. 18세기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될 무렵 노학자 안정복(安鼎福)은 젊은 학자들의 격한 주장에 맞서 불쇠옹(不衰翁)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8월 가을에 순암(順菴) 안공(安公)이 동궁(東宮) 계방관(桂坊官)이 되었는데 숙배(肅拜)한 뒤에 상께서 특별히 인대(引對)하고는 기뻐하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쇠하지 않았구려.” 하셨다. 이 때 공의 나이 73세였다.
  당초 상께서 동궁에 계실 때 공이 계방관으로 누차 서연(書筵)에 들어가서 경전의 뜻을 설명하니, 상께서 공의 학문이 정밀하고 순정(醇正)함을 알고 남달리 권애(眷愛)하셨다. 그리고 등극하신 지 6년째 되던 해에 원자가 탄생하셨고 3년 뒤에 다시 춘계방(春桂坊)1) 을 설치할 때 상이 공과의 옛 인연을 잊지 못하여 특별히 이 직책에 제수하였고, 또 그동안 10년 사이에 공의 용모와 음성이 옛날보다 못하지 않음을 기뻐하셨다. 공이 물러나 자기 집에 불쇠헌(不衰軒)이란 편액을 걸었으니, 성상의 말씀에 감격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얘기를 듣고 마음속으로 말하였다. “공이 칩거하며 경서를 연구하였으니, 생각건대 사물의 이치는 거의 남김없이 궁구하였을 터이다. 그런데 이제 불쇠헌이란 편액을 건 것을 보면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저 성쇠(盛衰)는 평상한 이치이니, 천지(天地)도 면할 수 없으며 성인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천지와 성인의 경우에는 그 기운은 때가 되면 쇠하지만 그 이치는 쇠할 때가 없으니, 비록 쇠하지 않는다[不衰]고 해도 될 것이다. 일반 사람이 성인에 가까울 수 없는 것은 하늘에 사닥다리를 놓아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으니, 고금의 아득한 세월 동안 천지 사이에 가득했던 인물들이 어찌 쇠하지 않은 적이 있으리요. 성상께서 공에게 말씀하신 것은 단지 이목구비와 같은 육신이 정정함을 가리킨 것일 뿐이지 마음속의 이치까지 아울러 말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데도 공은 의연히 불쇠(不衰)라는 두 글자를 자신의 호로 삼았으니, 이를 통하여 스스로 경각(警覺)한다고 한다면 되겠지만 이 호칭으로 자처한다고 한다면 나는 아무래도 옳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리는 소문에 공이 젊은 사람들의 구설에 몹시 시달리고 있는데 그들이 입을 모아 떠들며 공을 두고 노망이 들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서양의 이마두(利瑪竇)가 저술한 책이 근자에 비로소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학문에 뜻을 둔 젊은이들이 예전에 배운 것에 싫증을 느끼고 신기한 주장을 좋아하여 바람에 휩쓸리듯이 저마다 자기가 배운 학문을 버리고 그 쪽을 따르면서 심지어 “부모도 천주(天主)에 비하면 오히려 남이다. 임금은 권속이 없어야만 세울 수 있다. 음양(陰陽) 두 기운이 만물을 생성할 수 없다. 천당과 지옥은 분명히 있다. 태극도(太極圖)는 대대(對待)로 말한 것에 불과하다. 천주가 참으로 강림한 것이 예수이다.”라고 한다. 대개 그들의 주장은 아득하고 속임수가 많아서 종잡을 수 없는데 하나도 정주(程朱)의 학설과 어긋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들이 불교를 비방하는 것은 바로 도둑이 주인을 미워하는 격일 뿐이다. 옛날에 맹자(孟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우려하여 홍수와 맹수에 비기기까지 하셨던 것은 그 폐해가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데 빠져들 수도 있음을 매우 강조했던 것일 뿐이다. 양주와 묵적이 어찌 이마두의 주장처럼 스스로 임금을 멀리한 적이 있었겠는가.
  공은 산골에서 긴긴 밤 동안 크게 근심하고 길게 탄식한 나머지 혈혈단신으로 일어나 한창 일어나는 젊은이들의 거센 기세를 막고서 준엄한 말로 꾸짖기도 하고 온화한 말로 타이르기도 하였다. 우리의 도를 지킬 수만 있다면 비방을 받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사설을 막을 수만 있다면 환해(患害)를 당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니, 지주(砥柱)2)가 있지 않다면 미친 물결을 어떻게 막을 수 있으며 촛불이 있지 않다면 어두운 방을 무슨 수로 밝히리오.
  훌륭하도다! 공의 어질고 용감함이여! 이에 사람들이 모두 하늘이 공을 쇠하지 않게 한 것은 공을 쇠하지 않게 한 게 아니라 우리의 유도(儒道)를 쇠하지 않게 하고자 한 것임을 알았다. 공이 불쇠 두 글자로 자처하였으니 자기 신념이 돈독함을 알 수 있고, 성상께서 이 두 글자를 공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에서 신하를 알아보는 안목이 밝으셨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유자(儒者)라 공의 풍도(風度)를 듣고 붓을 당겨 불쇠헌의 기(記)를 쓰노라.

1) 춘계방(春桂坊)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인 춘방(春坊)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인 계방(桂坊)의 합칭이다.
2) 지주(砥柱) : 중국 하남성(河南省) 삼문협시(三門峽市)에 있던 바위산이다. 황하의 거센 물살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기둥처럼 꿋꿋하게 서 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댐이 건설될 때 폭파되어 지금은 없다.

[八年秋, 順菴安公, 爲東宮桂坊官. 旣肅命, 上特賜對喜曰君不衰, 公時年七十三. 初, 上之在銅闈, 公以桂坊官屢入書筵, 剖說經義; 上知公學術精醇, 眷待異於衆. 御極之六年, 誕生元良, 越三年, 復設春桂坊; 上耿然念公舊, 特命除是職, 又喜其十年之間容貌辭氣無减乎昔也. 公退而名其軒曰不衰, 蓋感聖諭也. 余聞而語于中曰: “公閉戶竆經, 意其事物之理, 竆格殆盡; 今以名其軒觀之, 無乃滋人之惑歟! 夫盛衰, 理之常也; 天地不能免焉, 聖人亦不能免焉. 然天地與聖人, 其氣有時而衰, 而其理無時而衰; 雖以不衰蔽之, 可也. 人之不可以幾於聖, 猶天之不可以梯也. 往古來今, 人物之盈於兩間者曷嘗有不衰也哉! 上所以諭公者, 特指其五官之精而已, 未必並論其在中之理, 而公乃毅然以二字自命; 謂之因是而自警則可, 謂之自居則吾未見其可也.” 未幾, 聞公大困於年少輩口舌, 譁然以老妄歸之. 蓋西國利瑪竇輩所著書, 近始有流出東國者, 年少志學之人, 厭舊聞而喜新奇, 靡然棄其學而從焉, 至曰: “父母比天主, 猶爲外也. 人主無眷屬而後可立也. 二氣不能生萬物也. 堂獄的然爲眞有也. 太極圖不過爲對待語也. 天主眞降爲耶蘓也.” 蓋其爲說, 汪洋譎詭, 千百其端, 而無一不與程朱乖盭; 其所以詆排釋氏, 直盜憎主人耳. 古之聖人, 以楊墨爲憂, 至比之洪水猛獸者, 蓋極言其弊之入於無父無君耳; 爲揚墨者, 曷嘗自以君父爲可外, 如瑪竇之說也哉? 公竆山永夜, 隱憂永歎, 以孑然一身, 起以當方生之勢, 或嚴辭而斥之, 或溫言而曉之, 吾道可衛, 則譏嘲有不恤也, 邪說可拒, 則患害有不顧也; 不有砥柱, 狂瀾何得以障也, 不有孤燭, 暗室何由以明也! 盛矣哉! 公之仁且勇也. 於是乎人皆知天之使公而不衰者, 非不衰公也, 欲吾道之不衰也. 公之以二字自居, 可知其自信之篤, 而上之以是而諭公者, 亦可驗知臣之明也. 余懦者, 聞公之風而立, 遂援筆作不衰軒記. ]


      ▶ 로마중앙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天主實義》

- 채제공(蔡濟恭 1720~1799)
〈불쇠헌기(不衰軒記)〉《번암집(樊巖集)》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불쇠헌(不衰軒)에 대해 써준 기(記)이다. 이 글에는 천주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다. 그래서 번암은 젊은이들의 공격을 받게 될까 염려하여 이 글을 써두고도 순암에게 보내지 않았는데, 순암이 편지를 보내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보내달라고 종용하였다.

  순암은 61세 때인 임진년(1772, 영조 48)에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에 임명되어 당시 세자인 정조(正祖)를 모셨고, 73세 때인 갑진년(1784, 정조 8)에 다시 익위사 익찬이 되어 임금이 된 정조를 만났다. 12년 만에 순암을 만난 정조는 특별히 접견하고 “쇠하지 않았구려.” 하였다. 정조가 자신을 잊지 않고 기억해준 데 감격한 순암은 자기 집에 불쇠헌(不衰軒)이란 편액을 걸고 시를 지었다.

    근력이 해마다 줄어 스스로 탄식하는데               自歎筋力逐年衰
    성상께선 쇠하지 않았다고 정녕히 말씀하셨네      天語丁寧諭不衰
    신의 육신이 쇠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不是臣身能不衰
    늙어도 지기는 쇠하지 않도록 하려 하신 게지       要令志氣不隨衰

  그 뒤로 순암은 불쇠옹을 자신의 호로 쓰기도 하였다. 이마두(利瑪竇)는 《천주실의(天主實義)》의 저자인 예수회 중국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를 중국어로 음역(音譯)한 것이다.

  위에서 “부모도 천주(天主)에 비하면 오히려 남이다. 임금은 권속이 없어야만 세울 수 있다.”고 한 주장은 유교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논리이다. 임금은 권속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왕실의 계승에 의한 왕정(王庭)을 부정하고 공화정을 주장하는 것이다. “음양(陰陽) 두 기운이 만물을 생성할 수 없다. 태극도(太極圖)는 대대(對待)로 말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성리학의 이론을 비판한 것이다. 즉 성리학의 학설은 음양이 만물을 이루고 있는 현상을 설명한 것일 뿐이지 우주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18세기에 와서 《천주실의》가 조선의 학자들 사이에 읽히면서 성호(星湖)의 문하에서도 재주가 뛰어난 젊은 학자들이 속속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당시 성호학파(星湖學派)에서 어른이었던 순암은 젊은이들이 화를 당할까 염려하여 천주교를 강력히 비판하다가 도리어 젊은이들로부터 노망이 들었다는 욕까지 들었고, 친한 동문에게 절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순암은 다시는 입을 열지 않겠는다는 뜻에서 벼룻집 표면에다 마도견(磨兜堅)3) 세 글자를 쓰고 <폐구음(閉口吟)>이란 시를 짓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순암이 걱정했던 대로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부터 사옥(邪獄)이 일어나기 시작해 수많은 사람들이 참화를 입고 말았다.

  순암은 실학자였고, 주자학을 존숭했으나 결코 맹신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확신할 수 없는 주장을 무턱대고 받아들일 수 없어 천주교를 반대했으리라. 지금에 와서 당시 천주교 비판의 선악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젊은이들의 호기심을 마냥 억눌러서도 안 되겠지만, 자신이 확신할 수 없는 것을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않는 근후(謹厚)한 자세도 우리는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다. 또한 젊은이들로부터 갖은 모욕과 비방을 받으면서도 자기 소신을 지키고 젊은이들이 위험에 빠질까 진심으로 걱정하였던 불쇠옹의 어른다운 처신이 더욱 그리워지는 오늘날이다.

3) 마도견(磨兜堅) :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철경록(輟耕錄)》에 “양주(襄州) 곡성현(穀城縣) 성문 밖 길가에 석인(石人)이 있는데, 그 배를 깎고 글자를 새기기를 ‘마도견이여, 삼가하여 말을 하지 말라[磨兜堅, 愼勿言.]’ 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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