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가을에 순암(順菴) 안공(安公)이 동궁(東宮) 계방관(桂坊官)이 되었는데 숙배(肅拜)한 뒤에 상께서 특별히 인대(引對)하고는 기뻐하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쇠하지 않았구려.” 하셨다. 이 때 공의 나이 73세였다. 당초 상께서 동궁에 계실 때 공이 계방관으로 누차 서연(書筵)에 들어가서 경전의 뜻을 설명하니, 상께서 공의 학문이 정밀하고 순정(醇正)함을 알고 남달리 권애(眷愛)하셨다. 그리고 등극하신 지 6년째 되던 해에 원자가 탄생하셨고 3년 뒤에 다시 춘계방(春桂坊)1) 을 설치할 때 상이 공과의 옛 인연을 잊지 못하여 특별히 이 직책에 제수하였고, 또 그동안 10년 사이에 공의 용모와 음성이 옛날보다 못하지 않음을 기뻐하셨다. 공이 물러나 자기 집에 불쇠헌(不衰軒)이란 편액을 걸었으니, 성상의 말씀에 감격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얘기를 듣고 마음속으로 말하였다. “공이 칩거하며 경서를 연구하였으니, 생각건대 사물의 이치는 거의 남김없이 궁구하였을 터이다. 그런데 이제 불쇠헌이란 편액을 건 것을 보면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저 성쇠(盛衰)는 평상한 이치이니, 천지(天地)도 면할 수 없으며 성인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천지와 성인의 경우에는 그 기운은 때가 되면 쇠하지만 그 이치는 쇠할 때가 없으니, 비록 쇠하지 않는다[不衰]고 해도 될 것이다. 일반 사람이 성인에 가까울 수 없는 것은 하늘에 사닥다리를 놓아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으니, 고금의 아득한 세월 동안 천지 사이에 가득했던 인물들이 어찌 쇠하지 않은 적이 있으리요. 성상께서 공에게 말씀하신 것은 단지 이목구비와 같은 육신이 정정함을 가리킨 것일 뿐이지 마음속의 이치까지 아울러 말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데도 공은 의연히 불쇠(不衰)라는 두 글자를 자신의 호로 삼았으니, 이를 통하여 스스로 경각(警覺)한다고 한다면 되겠지만 이 호칭으로 자처한다고 한다면 나는 아무래도 옳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리는 소문에 공이 젊은 사람들의 구설에 몹시 시달리고 있는데 그들이 입을 모아 떠들며 공을 두고 노망이 들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서양의 이마두(利瑪竇)가 저술한 책이 근자에 비로소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학문에 뜻을 둔 젊은이들이 예전에 배운 것에 싫증을 느끼고 신기한 주장을 좋아하여 바람에 휩쓸리듯이 저마다 자기가 배운 학문을 버리고 그 쪽을 따르면서 심지어 “부모도 천주(天主)에 비하면 오히려 남이다. 임금은 권속이 없어야만 세울 수 있다. 음양(陰陽) 두 기운이 만물을 생성할 수 없다. 천당과 지옥은 분명히 있다. 태극도(太極圖)는 대대(對待)로 말한 것에 불과하다. 천주가 참으로 강림한 것이 예수이다.”라고 한다. 대개 그들의 주장은 아득하고 속임수가 많아서 종잡을 수 없는데 하나도 정주(程朱)의 학설과 어긋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들이 불교를 비방하는 것은 바로 도둑이 주인을 미워하는 격일 뿐이다. 옛날에 맹자(孟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우려하여 홍수와 맹수에 비기기까지 하셨던 것은 그 폐해가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데 빠져들 수도 있음을 매우 강조했던 것일 뿐이다. 양주와 묵적이 어찌 이마두의 주장처럼 스스로 임금을 멀리한 적이 있었겠는가. 공은 산골에서 긴긴 밤 동안 크게 근심하고 길게 탄식한 나머지 혈혈단신으로 일어나 한창 일어나는 젊은이들의 거센 기세를 막고서 준엄한 말로 꾸짖기도 하고 온화한 말로 타이르기도 하였다. 우리의 도를 지킬 수만 있다면 비방을 받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사설을 막을 수만 있다면 환해(患害)를 당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니, 지주(砥柱)2)가 있지 않다면 미친 물결을 어떻게 막을 수 있으며 촛불이 있지 않다면 어두운 방을 무슨 수로 밝히리오. 훌륭하도다! 공의 어질고 용감함이여! 이에 사람들이 모두 하늘이 공을 쇠하지 않게 한 것은 공을 쇠하지 않게 한 게 아니라 우리의 유도(儒道)를 쇠하지 않게 하고자 한 것임을 알았다. 공이 불쇠 두 글자로 자처하였으니 자기 신념이 돈독함을 알 수 있고, 성상께서 이 두 글자를 공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에서 신하를 알아보는 안목이 밝으셨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유자(儒者)라 공의 풍도(風度)를 듣고 붓을 당겨 불쇠헌의 기(記)를 쓰노라.
1) 춘계방(春桂坊)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인 춘방(春坊)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인 계방(桂坊)의 합칭이다. 2) 지주(砥柱) : 중국 하남성(河南省) 삼문협시(三門峽市)에 있던 바위산이다. 황하의 거센 물살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기둥처럼 꿋꿋하게 서 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댐이 건설될 때 폭파되어 지금은 없다. |
[八年秋, 順菴安公, 爲東宮桂坊官. 旣肅命, 上特賜對喜曰君不衰, 公時年七十三. 初, 上之在銅闈, 公以桂坊官屢入書筵, 剖說經義; 上知公學術精醇, 眷待異於衆. 御極之六年, 誕生元良, 越三年, 復設春桂坊; 上耿然念公舊, 特命除是職, 又喜其十年之間容貌辭氣無减乎昔也. 公退而名其軒曰不衰, 蓋感聖諭也. 余聞而語于中曰: “公閉戶竆經, 意其事物之理, 竆格殆盡; 今以名其軒觀之, 無乃滋人之惑歟! 夫盛衰, 理之常也; 天地不能免焉, 聖人亦不能免焉. 然天地與聖人, 其氣有時而衰, 而其理無時而衰; 雖以不衰蔽之, 可也. 人之不可以幾於聖, 猶天之不可以梯也. 往古來今, 人物之盈於兩間者曷嘗有不衰也哉! 上所以諭公者, 特指其五官之精而已, 未必並論其在中之理, 而公乃毅然以二字自命; 謂之因是而自警則可, 謂之自居則吾未見其可也.” 未幾, 聞公大困於年少輩口舌, 譁然以老妄歸之. 蓋西國利瑪竇輩所著書, 近始有流出東國者, 年少志學之人, 厭舊聞而喜新奇, 靡然棄其學而從焉, 至曰: “父母比天主, 猶爲外也. 人主無眷屬而後可立也. 二氣不能生萬物也. 堂獄的然爲眞有也. 太極圖不過爲對待語也. 天主眞降爲耶蘓也.” 蓋其爲說, 汪洋譎詭, 千百其端, 而無一不與程朱乖盭; 其所以詆排釋氏, 直盜憎主人耳. 古之聖人, 以楊墨爲憂, 至比之洪水猛獸者, 蓋極言其弊之入於無父無君耳; 爲揚墨者, 曷嘗自以君父爲可外, 如瑪竇之說也哉? 公竆山永夜, 隱憂永歎, 以孑然一身, 起以當方生之勢, 或嚴辭而斥之, 或溫言而曉之, 吾道可衛, 則譏嘲有不恤也, 邪說可拒, 則患害有不顧也; 不有砥柱, 狂瀾何得以障也, 不有孤燭, 暗室何由以明也! 盛矣哉! 公之仁且勇也. 於是乎人皆知天之使公而不衰者, 非不衰公也, 欲吾道之不衰也. 公之以二字自居, 可知其自信之篤, 而上之以是而諭公者, 亦可驗知臣之明也. 余懦者, 聞公之風而立, 遂援筆作不衰軒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