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화상에 대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쓴 발문인데, 매월당 자신이 직접 그린 자화상을 모사한 그림을 보고 쓴 것이다.
매월당은 절의(節義)를 지킨 유자(儒者)와 불교의 고승, 두 가지 모습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왕명을 받고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서 ‘심유적불(心儒跡佛)’로 매월당의 정체를 규정한 바 있다. 그의 사상의 본령은 유교이고 승려 생활은 살아가는 방편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암은 매월당이 스스로 그린 자기 화상의 마지막 모습이 승려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연지(延之)는 조선시대 문신이요 학자인 김수증(金壽增 1634~1701)의 자이다. 그는 호가 곡운(谷雲)이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다. 위 석실선생은 바로 청음을 가리킨다.
김수증은 1670년, 강원도 화천 용담리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짓고 은거하면서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 자신이 사는 지역을 곡운(谷雲)이라 명명하고 화가 조세걸(曺世傑 1635~1705)을 시켜 실경산수화로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다. 따라서 매월당 화상도 김수증이 조세걸을 시켜서 모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태백(泰伯)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맏아들이다. 태왕에게 아들이 셋 있었는데 태백, 중옹(仲雍), 계력(季歷)이었다. 태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생각이 있었는데 태백이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막내 계력은 창(昌)이라는 훌륭한 아들을 두었기에 태왕은 왕위를 계력에게 물려주어 창에게 전해지게 하려 하였다. 태백은 부친의 뜻을 알고 아우 중옹과 함께 나라를 떠나 남쪽 오랑캐의 땅인 형만(荊蠻)에 가서 단발문신(斷髮文身)하여 스스로 후사(後嗣)가 될 수 없음을 보였다. 창이 훗날 문왕(文王)이 된다. 조선의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전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그 뜻이 은미하다.”고 한 선유(先儒)는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에 나오는 범씨(范氏), 즉 범준(范浚)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태백(泰伯)>에서 공자는 태백과 문왕 두 사람을 두고 각각 “지극한 덕이라 이를 만하다.” 하였는데, 태백과 문왕 모두 임금을 배반하지 않고 천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자가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자를 경계하는 뜻을 은미하게 담아서 말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우암은 매월당이 단종(端宗)에 대해 절의를 지켜 불사이군(不事二君)한 것을 높이기 위해 서두에 이 말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사육신(死六臣)의 성삼문(成三問) 신주와 생육신(生六臣)의 매월당 화상을 함께 말함으로써 두 사람의 절의를 아울러 치켜세웠다.
매월당의 유교에 대한 인식은 매우 긍정적인데 불교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 비판과 수용의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그래서 얼핏 보아서는 율곡의 말처럼 그의 사상 성향이 유교 쪽으로 더 쏠려 있는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런데 정작 매월당 스스로 그린 자신의 만년의 모습은 승려의 복장에 목에는 염주를 두르고 있다.
탁월한 식견을 가진 문학가요 사상가였던 그로서는 천부의 재능을 자랑할 수 있는 문학을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고 유자(儒者) 본연의 임무인 현실 참여를 포기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예로부터 유자들이 통상 그러했듯이 불교에 심취했더라도 그 자신은 역사에서 유자로 평가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실제로 때로는 불교에 마음이 끌리기도 하고 때로는 정주(程朱)의 학설에도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 어느 한 곳에 안정하지 못하는 충동성 등 천재가 갖기 쉬운 속성을 우리는 매월당에게서 볼 수 있다.
매월당은 유교와 불교를 넘나들며 어느 한 쪽에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지금 매월당의 문집을 보면, 청산과 세속을 넘나드는 삶의 자취, 그리고 그에 상응하듯 불도(佛道)에 심취하다가 문득 스스로를 명교(名敎)의 죄인으로 자책해 놓고는 그리고 다시 입산하는 등의 불안정한 심적 변화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경주(慶州)를 지나다가 오도(悟道)했다는 기록을 스스로 남겼지만 그는 결코 깨달음을 이룬 각자(覺者)로 자처하지도 않고 천재가 갖기 쉬운 현실과 자아와의 괴리, 그로 인해 생겨난 모순과 갈등을 농세(弄世)의 자조(自嘲)로 거침없이 표출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상반되고 모순되게 보이는 모습들은 바로 그의 내적 변화의 적나라한 표출이었다.
매월당은 자신이 그린 화상(畵像)에 스스로 적기를 “네 모습은 지극히 하찮고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으니, 의당 너를 산골짜기에 두어야 하리.[爾形至藐 爾言大侗 宜爾置之 丘壑之中]” 하였으니, 세상을 아주 떠나 청산에 머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세상에 맞추어 살아갈 수도 없는 자신을 희화한 자조의 독백일 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