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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an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쥐 겨울궁전의 야경

러시아혁명의 발상지 궁전광장
(Palace Square)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는 러시아의 북서부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면적은 1,439km2이며 2008년 기준으로 인구는 456만 8천 명으로 러시아에서는 수도 모스크바 다음으로,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인구가 많다. 북위 59°57、에 위치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인구 백만 이상의 도시 중 가장 북방에 위치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연방을 구성하는 83개의 연방주체들(21개 공화국, 9개 변강주, 46개 주, 2개 연방시, 1개 자치주, 4개 자치구) 중 모스크바와 함께 '연방시'의 위상을 갖고 있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광활한 북서지역에 위치하여 이 도시를 내륙으로 둘러싸고 있는 레닌그라드주(州)의 주도(州都)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비교적 '젊은 도시'에 속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는 러시아의 개혁군주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북방 전쟁(1700~1721)을 위해 1703년 네바강(江) 하구에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고작 300년을 갓 넘긴, 유럽에서 비교적 역사가 짧은 도시에 속한다. 그러나 지난 세월 이 도시는 그 어떤 도시도 견줄 수 없는 가혹한 역사의 풍파를 헤쳐 나왔고, 도약과 반전이 거듭되는 세기적 전환기마다 그 중심에 서서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연출해왔다.

격동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의 변천사에는 이 도시와 러시아 근세사의 영욕이 깊이 새겨져 있다. 1703년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이 도시는 1713년부터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처음 도시의 이름은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으로 독일식 표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이 이름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적성국인 독일식 표현이라는 이유로 페트로그라드로 개칭되었다. '부르크'의 독일어가 도시를 뜻하는 러시아어 '그라드'로 교체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 이후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이 도시는 다시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바뀌었다. 이후 20세기 70여 년의 세월 동안 레닌그라드는 '혁명'을 상징하는 도시로 각인되었다.

동유럽에서 민주화의 거센 광풍이 몰아치고 현실사회주의의 붕괴가 도미노처럼 확산되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불온한 기억을 지워버리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아나톨리 소브차크 시장의 발의로 도시 이름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민투표를 했고, 다수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1991년 11월 7일 도시명은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본래 도시 이름을 되찾았다는 것은 잃어버린 도시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마찬가지로 소련 시절 모스크바 동부의 고리키는 니즈니 노보고로드로, 남부의 스탈린그라드는 볼고그라드로, 우랄의 스베르들로프스트는 예카테린부르크로 예전의 명칭을 되찾았다. 199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명의 복귀는 두 가지 측면을 함축하고 있다. 사회주의 70여 년의 역사와 그 잔재를 지워버리고, 이념적 극단주의에 의해 해체된 러시아적 전통을 되살리려는 복고주의적 시대 경향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 내부에는 표트르 대제 시기 제국 수도의 화려한 영화를 추억하는 노스탤지어와 21세기 그 제국의 부활을 향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 내부에 흐르는 그리바에도프 운하

유럽 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위치

한민족의 영혼이 깃든 곳

한민족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 도시다. 세계 최초로 대학에서 한국어강좌가 개설된 곳이며, 러시아 최초의 한국공사관이 설치된 도시이자 일본의 국권강탈에 항거하며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비운의 생을 마감한 애국지사의 영혼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민영환을 최초의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도록 했다. 1896년 5월 민영환은 특사사절단을 이끌고 최초로 방러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3개월간 체류한 뒤 귀국했고, 3년이 지나서 1899년 3월 이범진 공사가 임명(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겸임)되었다. 이후 1901년 3월 이범진 공사는 주러 상주공사로 임명(겸임공사 해제)되어 외교활동을 전개했지만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로 외교관 신분이 박탈되고, 1910년 8월 29일 매국내각에 의한 한일합방안이 발표되자 더 이상 구차한 생명을 부지할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북유럽의 베네치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을까? 어느 하나로 집약시킬 수는 없지만 이 도시를 방문한 사람들은 대체로 웅장함, 화려함, 생명력과 역동성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러시아인들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혁명의 요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1825년 12월 전제정치와 농노제에 반대한 청년귀족들의 데카브리스트 혁명, 러시아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던 1905년 혁명, 그리고 1917년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까지, 꺼지지 않는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고, 마침내 세계를 변혁하는 사상이 현실에서 실험되는 공간은 언제나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혁명적 역동성은 비단 사회주의를 향한 실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소련사회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도시도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어떤 도시로 각인되어 있을까? 아마도 '혁명' 다음으로 강하게 형성된 이미지는 '백야(白夜)의 도시'일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위도상으로는 상당히 북쪽에 있지만 대서양의 영향으로 남쪽에 있는 모스크바보다 온화한 기후를 보이며, 북극권이 가까운 까닭에 겨울철에는 밤이 길지만 여름 초기 6∼7월에는 백야가 계속된다. 영화 '백야' 덕분인지는 몰라도 매년 여름이면 백야 축제를 보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길고 음산한, 회색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어내고 맞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는 특별하다. 황혼의 땅거미가 지다가 다시 서서히 하늘에 붉은색의 기운을 흩뿌리는 기묘한 자연현상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물이 함께 어우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물의 도시다. 네바 강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휘돌아 나가고, 이 도시의 전경은 크고 작은 섬과 습지 위에 세워진 육중한 조형물로 구성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00여 개의 섬이 365개(교외 지역까지 600여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복합비즈니스센터인 오흐타센터 모형

네바 강과 페테르부르크 지역 전경

유럽으로 향한 창

사실 도시 창건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코스모폴리탄적 이상을 지향했던 공간이었다. '유럽으로 향한 창'이라는 사명 자체가 도시 창건부터 부여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1703년 모스크바를 떠나 네바 강 늪지대에 도시를 건설하고 수도를 옮긴 것은 정치·군사적인 고려에서였다. 내부적으로는 유럽식 강성국가를 건설하고, 발트해를 중심으로 하는 북유럽 상권에 러시아가 적극 진출하면서 제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것이 개혁군주 표트르의 원대한 포부였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은 전 시기에 걸쳐 끊임없이 파괴와 건설, 개조와 변용, 차용과 창조를 쉬지 않고 해왔던 전제군주였다. 개혁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그의 논리는 '전쟁에서의 승리'였고, 이것은 유럽의 강한 제국을 반석 위에 세우려는 목표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20세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도 모스크바에 가려졌고, 도시의 발전은 정체되었다. 1918년 수도가 모스크바로 이전하고, 모든 정치·경제권력이 중앙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과거 제국의 수도로서의 영화를 잃어버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늘 모스크바 다음의 '제2의 수도'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1990년대 개혁·개방 시기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엘리트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교하며 그들에게 남겨진 제국의 유산과 문화적 우월성을 자랑했지만, 엄혹한 '자본의 논리'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모스크바가 시장경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자본의 80% 이상을 흡입하는 블랙홀로 거듭난 반면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오랜 기간 '문화와 예술의 중심'이라는 명예와 함께 북서지역의 중심도시라는 자존심을 지키기는 했지만 인구 천만을 넘는 수도 모스크바의 위용과는 견줄 수 없는 낙후된 지방 도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국제교류중심지로의 도시발전전략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과거 제국의 수도로서 누렸던 영화를 재현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교류중심지로 만든다는 '도시발전전략'이 수립되었다. 이 전략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발트 해와 러시아 북서부를 대표하는 다기능 국제 거점도시로 만든다는 목표하에 교통, 산업, 관광, 문화, 정보, 통신을 망라하는 세부안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판단되었다. 구도심을 중심으로 도시 전역에 분산된 역사 유적과 박물관,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예술, 교외 지역의 많은 휴양시설들은 외국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귀중한 관광자원이었다. 과학기술이 집적된 도시이고 저렴한 임금에 고급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거론되었다. 게다가 유럽에 인접해 있는 지정학적 이점 덕분에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졌다.

 

 

 

화려한 분수를 자랑하는 여름궁전

황금빛 돔으로 유명한 성 이삭 대성당

21세기형 국제도시로 도약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시발전에 필요한 것은 21세기형 국제도시로 거듭날 수 있는 새로운 도시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며,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자본을 조달하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중앙에 진출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정치엘리트들이 낙후된 고향을 재도약시키기 위해 대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에르미타쥐, 마린스키 극장 등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관광자원의 시설 개보수 등에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3년 도시 창건 300주년 행사와 2006년 여름 G8 정상회담 개최를 계기로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도시로 부상했다. 매년 백야가 시작되는 5월부터 여름 내내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외국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그에 따라 도시 전체가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제2의 수도'라는 꼬리표를 떼고 21세기 러시아의 중심을 향해 전진해가고 있다. 2008년도에 헌법재판소가 이 도시로 이전했고, 러시아 상원을 비롯한 일부 국가기관의 이전 논의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러시아 굴지의 대기업 본사나 글로벌 외국기업들의 지사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가스프롬과 상트페테르부르크시는 가스프롬이 인수한 시브네프트(Sibneft) 본사를 시베리아의 옴스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하기 위해 스몰리니 사원 맞은 편 네바 강 우측 연안에 396m 높이의 초현대적인 '가스프롬 시티'를 건설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흉물이 될 것이라는 문화계 인사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오흐타 강변에는 복합비즈니스센터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가스프롬 시티'는 18세기 개혁군주 표트르의 이미지를 21세기에 재현하는, 이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 러시아에서 도시 발전을 가늠하는 척도는 외국인자본투자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유치 노력과 크레믈린의 후원 덕분에 2005년 14억 달러이던 외국인투자는 2006년과 2007년 각각 53억 달러, 63억 달러로 급증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거대도시로 도약하는 데 방해가 되는 제약요인들이 존재한다. 기존의 산업구조가 시설이 노후한 초대형 군수공장 위주여서 경제적 취약성을 갖고 있으며, 주택문제가 심각하고 교통, 상하수도, 전기, 전화 같은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측면들이 앞으로도 단기간 내에 해결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최근 일부 지표에서는 몇 년간 긍정적인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2005~2007년 주택건설은 각각 전년대비 11.9%, 4.5%, 11%씩 증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사업은 자동차 공장단지 유치사업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향후 이 도시를 자동차산업의 메카, '러시아의 디트로이트'로 키우겠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일본의 도요타, 닛산, 스즈키, 미국의 포드와 GM 등 세계 굴지의 자동차회사들의 생산라인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2007년 한국의 현대자동차도 연간 10만 대 생산규모의 조립공장을 건설하는 데 총 4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향후 러시아의 시장자본화가 진행될수록 자동차보유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고, 현재 러시아의 중앙정부가 현지공장이 없는 외국브랜드의 회색통관을 제한할 계획이기 때문에 자동차업계의 진출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마디로 외국기업들에게는 '강제투자'라 할 수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도래한 것인데, 앞으로 러시아 내수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라도 직접투자는 불가피한 선택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장기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도시발전을 위해 어떠한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1980년대에 정형화되었다. 일단 도시 경제의 두 축을 구성하고 있는 관광과 공업의 발전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입장이다. 그중에서도 러시아 중앙정부의 방침에 따라 첨단기술의 접목과 산업현대화를 중대한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 도시가 보유한 과학, 교육, 공업의 발전 수준을 하나로 통합하여 혁신적 발전의 길로 나아간다는 목표가 설정되었다.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기존의 조선과 기계산업 외에 정보통신 산업 등을 접목한 혁신도시, 문화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21세기형 르네상스 도시의 초석을 놓는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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