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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도올 김용옥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도올 김용옥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도올 김용옥

1장 #프롤로그

#인연 , 철학을 전공하다, #광덕사 로 가는 길, 이것은 #반불교 다!, 엄마의 공안

2장 #한국불교 의 흐름과 그 본질적 성격

#이순신 장군과 #서산대사 , #선조 와 서산대사의 인연, 서산과 해남 #대둔사 , 서산의 입적시

그리고 설법을 마치자 자기의 영정(초상화)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걸개 뒷면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입적의 순간에도 이러한 적멸송을 쓸 수 있는

정신력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도 죽는 순간에 이런 시 한 수 쓰고 깨끗하게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세상을 하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팔십년전거시아 (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전에는 거시기가 난 줄 알았는데,

팔십 년을 지나고 보니 내가 거시기로구나!"

41p-11

경허의 용맹정진, 개울 건넌 이야기, 예수와 경허, 명진의 이야기, 안거

밥 먹고 똥 싸는 것, 졸리면 자곤 하는 것이 선(禪)이다?

이 깊은 뜻을 조금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결코 쉽게 넘어가는 일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임제는 여기서 "일상의 삶" 그 모든 것이 선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는 모든 종교적 환상의 실체성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佛)도 없고, 도(道)도 없고,

법(法)도 없다. 그냥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럼 무엇이냐? 그걸 말해보자!

120p-8

3장 #싯달타 에서 #대승불교 까지

불교의 근본교리, 삼법인 또는 사법인, 제법무아, 불교는 죽음의 종교 아닌 삶의 종교

열반을 강조하기 때문에 불교를 "죽음의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불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 입니다. 열반은 죽음의 상태가 아니라 삶의 상태,

즉 번뇌의 불길이 다 사라진 고요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죠. 제법이 무아닌 것처럼 투철하게 확철하게 깨달은

사람은 열반의 상태에 들어가서 고요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지요.

133p-2

삼학과 삼장, <반야심경>의 심은 무슨 뜻?, 반야경과 도마복음서, 업, 윤회, 열반, 싯달타의 종교가 아니라 보살의 종교

불타나 예수나, 그들의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위대성은 단 하나!

"아상(我想)"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승은 전혀 초기불교, 부파불교와는 다른 갈래에서 나온

매우 혁명적인 새로운 교설이었지만 결국 "무아"라는 이 한 가르침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무한한 혁명을 수용합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혁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불교가 무한한 혁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그 최초의 원초적 핵심에 불교가 이래야만 한다는 "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192p-7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

오온의 가합인 나는 결국 공이다, 공의 철학이 아닌 무의 철학, 법정 스님의 무소유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

이 산스크리트어의 뜻은 비록 주문이지만 명료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건너간 자여 건너간 자여! 피안에 건너간 자여! 피안에 완전히 도달한 자여! 깨달음이여! 평안하소서!

238p-11

스무살 광덕사라는 절에서 만난 반야심경 260자에서 깨달은 바를 50년이 지나 풀어낸 이야기

불교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서 부터 한국불교의 흐름 그리고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아우르고 마지막을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로 마무리한다. 그렇게 반야심경이 반불교적 혁명을 이야기한다고 강조하는 도올의 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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