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이 지내시는 근황이 좋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소승은 줄곧 병으로 신음하는 두타(頭陀)로 지낼 뿐입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지난 달 모일에 실상사(實相寺) 약수암(藥水庵)의 승려 편에 서찰 한 통을 부쳤는데, 받아 보셨는지요? 지금 용문(龍門)으로 가는 인편이 있기에 몇 자 적어서 부칩니다. 유가(儒家)에서는 “군자는 자기를 미루어 갈 뿐이니, 자기에 만족하여 밖에서 바라고 기다림이 없는 것을 덕(德)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선비들이 늘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불교 공부에 적용해 보면 그 이치가 매우 많고 큽니다. 대개 생사(生死)와 열반, 범성(凡聖)과 선악(善惡)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참선, 송경(誦經), 기도, 염불 등 수행까지도 모두 밖의 것이 아님이 없으니, 자기 밖의 것이라면 이미 옳지 않습니다. 동정운위(動靜云爲)의 모든 행위에 자기도 모르게 외물(外物)에 얽매이고 이끌리는 것이 마치 교외의 우산(牛山)과 같습니다. 하물며 생사와 화복(禍福)이 갈리는 즈음에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조공(肇公)이 이르기를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다.” 하였는데, 이는 교가(敎家)에서 너무나 많이 써서 싫증이 나는 말이지만 도리어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 스님이 이르기를 “지극히 반조(返照)하여 자신이 의지할 데가 없으면 온 몸이 그대로 대도(大道)에 합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거울을 깨고 오면 그대와 서로 대면해 보리라.” 하였던 것입니다. 대저 일점 신령한 마음은 그 자체가 걸림 없이 툭 트이고 아주 말쑥하여 본래 갖추어진 바탕에 터럭만한 것도 아무 흔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도달할 본래 자리에 도달하면 자기의 밖이니 자기니 하며 지리(支離)하고 모호하게 구별할 필요가 없으니, 이 경지에 이르면 자유롭다는 것조차도 쓸데없는 말일 뿐입니다. 연년에 남쪽으로 오셨을 때 공께서 불법을 힘써 공부하는 것을 보았기에 안부 편지를 보내는 차제에 붓 가는 대로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정으로 받아주고 허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는 곳이 서로 아득히 멀어 만날 수 없는 터라 편지를 앞에 놓고 마음 서글픕니다.
[靜居道候, 伏想玄裕. 鯫禿一味作吟病頭陀而已, 奈何! 前月日附呈一札於實相藥水庵僧, 未知抵覽? 今有去龍門信便, 附以數字. 儒云: “君子推己, 足乎己不待於外之謂德.” 此是斯文常談. 然而參證於學佛者, 其理甚繁浩. 蓋生死涅槃凡聖善惡等事, 以至禪誦祈念等行, 無非是外, 外己早不是. 動靜云爲, 自不覺籃沮牽惹於物, 如四郊之牛羊. 況生死禍福之際乎? 其不自由者必矣. 肇公云: “至人無己.” 此亦敎場篘狗, 却有味旨. 古古德云: “照盡體無倚, 通身合大道.” 又云: “打破鏡來, 與爾相見.” 夫一點靈臺, 廓然淨盡, 絶廉纖, 勿痕縫於本有田地. 到其所到, 不用支離塗糊於己之外與己矣. 其自由二字, 亦閒言語. 年前南來之日, 見公學佛精苦, 因寒喧信筆及此, 不覺打煩蔓. 領情勿咎申企耳. 相去杳隔, 臨紙惘然.]
- 경허(鏡虛) 성우(惺牛 1846~1912)〈장 상사와 김석두에게 올리는 편지[上張上舍金石頭書]〉《경허집(鏡虛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