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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ㆍ15 해방, 그리고 새로운 『대학(大學)』

8ㆍ15 해방, 그리고 새로운 『대학(大學)』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1945년은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진 한 해였다. 이 해는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난 8ㆍ15 해방의 해이기도 했지만,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한반도가 분할 점령된 38선 분단의 해이기도 했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38선은 더욱 뚜렷해져 급기야 1948년에는 남북분단의 선이 되었고, 1950년에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선이 되었다. 이 무렵, 어서 독립국가를 세워야 할 텐데, 어서 민족통일을 이루어야 할 텐데 하는 마음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관구(李觀求)는 『신대학(新大學)』을 집필하였다. 해방 3년사의 회한이 담긴 책자 『신대학』, 과연 이 새로운 『대학』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것을 보며 거듭 조선(朝鮮)을 위해 애통해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조선이 강성했을 때에는 하(夏)와 은(殷)을 뛰어넘는 문명이 있었고 수(隋)와 당(唐)을 능가하는 기세가 있었으니, 참으로 당세의 웅장한 기백이었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아, 분하다! 다른 나라 사람이1) 우리나라를 분단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떠들썩하게 울부짖고,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를 보호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빙그레 웃는다. 장상관리(將相官吏)는 외국인의 안색을 엿보고 마치 효자가 부모를 섬기듯 먼저 뜻을 받들 생각을 한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은 외국인의 숨소리만 들어도 환영하고 마치 유기(遊妓)가 정인(情人)에게 아양 떨듯 뛰어나가 받들며 분주히 달린다.
  이른바 정객(政客)의 의견이란 “우리는 자력독립(自力獨立)에 의지할 수 없소. 우리는 다만 미국 같은 큰 나라와 연결해서 부력(富力)을 빌려 점차 진보하기를 구할 뿐이오. 우리는 다만 소련 같은 큰 나라와 연결해서 그 공산주의(共産主義)를 빌려 점차 성장하기를 구할 뿐이오.”라고 한다. 민간의 생각도 마치 바람이 불어 대나무가 흔들리고 풍랑이 일어 대나무가 흔들리듯 별로 주장하는 바가 없고, 다만 생활이 안정되기를 구할 뿐이다. 이른바 지식계급의 생각도 “오늘 우리 조선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니 인의(仁義)와 화친(和親)이 있는 나라가 우리를 근심하고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면 좋겠다.”라고 하여 한 사람도 독립에 대한 좋은 계책을 내지 못한다. 더러 있더라도 세상에서 모두 그 뜻을 알지 못하고 까닭 없이 물리치니 누가 능히 선후책(善後策)을 내겠는가? 아, 애통하다! 우리나라의 오늘날 자격이 이와 같을 뿐이란 말인가? 우리나라 장래의 앞길도 필경 이와 같을 뿐이란 말인가? 아, 애통하다!
  옛날부터 민심이 전제(專制) 하에 있다가 갑자기 해방이 되니, 그 민심의 문란한 상태가 마치 홍수와 풍파처럼 일어나 사람들마다 모두 자기가 영웅이고 사람들마다 모두 자기가 애국자이고 사람들마다 모두 자기가 주의사상가(主義思想家)라 하여, 영웅과 애국자와 주의사상가가 조선 천지에 가득찼다. 그런데 이들에게 건국과 치국의 방책을 물으면 흉중에 도무지 한 가지 계책도 없고, 한두 당의 당수(黨首)가 각기 한 가지 계책을 제창하면 “나는 아무개를 지지한다. 나는 아무개를 지지한다.”고 하기만 하고 그 계획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으며, 각기 영수(領首)가 되어 끝내 서로 맞서는 당파가 되어서는 당쟁과 파쟁을 일삼는다. 이것이 이른바 ‘언덕에 올라 촛불을 잊고, 당을 이루어 나라를 잊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아, 애통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포를 훼방하는 마음은 있으나 동포를 존앙하는 마음은 없다. 때문에, 합하면 마치 마른 보리처럼 바람에 날리고, 흩으면 마치 굽이치는 냇가의 어지러운 돌처럼 하나도 규칙이 없다. 밖에 나가 함부로 자유를 부르짖다가 소위 암살사건(暗殺事件)이 연이어 일어나 속정(俗情)을 소란스럽게 하는데, 암살이란 애국자의 미행(美行)이 아니라 속류자(俗流者)의 객기이고 건국에 방해가 될 뿐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된 수구(守舊) 때문에 나라를 그르쳤다면 그 나라에 그래도 해 볼 만한 데가 있지만, 거짓 유신(維新) 때문에 나라를 그르쳤다면 그 나라에 도리어 해 볼 만한 데가 없으리니, 누가 능히 이를 알겠는가.

1)『新大學』의 원문은 우리나라 사람[吾人]이라 되어 있으나 『신대학』이 인용한 양계초(梁啓超)의 「신민설(新民說)」의 원문은 다른 나라 사람[他人]이라고 되어 있다. 「신민설」의 원문을 취하여 『신대학』의 오기를 바로잡는다.

[吾觀於此而不能不重爲朝鮮恫矣. 疇昔朝鮮盛强之世, 有越夏越殷之文明, 有凌隋凌唐之氣勢, 固當世之雄偉氣魄而今安在哉. 嗚呼忿哉! 聞吾人之議中分我國也則噭然而啼, 聞吾人之保護我國則囅然而笑, 將相官吏伺外國人之顔色, 先意承志如孝子之事父母, 士商農工仰外國人之鼻息, 趨承奔走如遊妓媚情人. 所謂政客之意見, 曰吾自力獨立不足恃矣. 吾但求結一大邦之美國, 以借其富力而漸進, 吾但求結一大邦之蘇聯, 以借其共産主義而漸成. 民間之意別無主張, 若風打之竹, 浪打之竹, 但求其生活安定. 其所謂知識階級之意, 曰今日吾朝鮮非可以自力自救, 庶幾有仁義和親之國, 恤我憐我助我乎, 無一人出可獨立之好策者. 若或有之, 世皆不知其意, 而無端斥之, 孰能善其後哉? 嗚呼恫哉! 我國今日之資格如斯而已乎? 我國家將來之前途竟如斯而已乎? 嗟呼恫哉! 疇昔專制下之民心. 突然解放, 其民心之紊亂狀態, 若洪水濫波, 人人皆自英雄, 人人皆自愛國者, 人人皆自主義思想家, 英雄愛國者主義思想家, 遍滿朝鮮天地, 對其人問其建國治國之策, 則胸中都無一策, 有一二黨首者, 各倡一計, 則曰我支持某也, 我支持某也, 不擇其計劃之善不善, 各爲其領首, 終成相對之黨派, 以黨爭派爭爲事, 是所謂登壟忘燭, 成黨忘國者也. 嗚呼恫哉! 吾國人有同胞毁妨之心, 無同胞尊仰之心, 故合之如乾麥隨風飛散, 散之則如溪回亂石一無規則, 妄呼野出自由, 所謂暗殺事件踵起而擾亂俗情, 暗殺者也, 非愛國者之美行, 而俗流者之客氣也, 而爲建國之妨害也, 可不愼哉! 以眞守舊誤國, 而國尙有可爲, 以僞維新誤國, 而國乃無可救者, 其孰能知之?]


                                ▶ 『대학(大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이관구(李觀求 1885~1953),『新大學』 제3장 「新民」 제9절 「論自尊」

  말은 사회의 거울이다. 우리나라 말에 ‘공자왈맹자왈(孔子曰孟子曰)’이 있다. 별로 좋은 뜻이 아니다. 공자와 맹자를 거론하면서 아는 척 한다는 뜻인데, 그 앎이 편협하고 고지식하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어감이 담겨 있다. 공자와 맹자는 유가의 성현인데 ‘공자왈맹자왈’이라는 우리말은 왜 이렇게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는 것일까? 이 기묘한 모순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누군가는 말하리라. ‘공자왈맹자왈’이란 말은 있어도 ‘노자왈장자왈(老子曰莊子曰)’이라는 말은 없지 않은가? 우리 전통 사회의 지식인이 너무 유가(儒家) 독존적인 성향이 있어서 그에 대한 반감이 스며든 것이겠지. 또, 누군가는 말하리라. ‘공자왈맹자왈’이란 말은 있어도 ‘주공왈공자왈(周公曰孔子曰)’이란 말은 없지 않은가? 공맹(孔孟) 관념이 고려 중기 이후에 유입된 것이니까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 ‘공자왈맹자왈’의 폐단은 없었겠지. 다시 또 누군가는 말하리라. 실제 『논어(論語)』를 보면 대개 ‘자왈(子曰)’이라고 하지 ‘공자왈(孔子曰)’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공자왈맹자왈’은 『논어』에 대한 기초적인 소양조차 없는 일반 속인들이 유자(儒者)에 대한 반감을 나타낸 말이겠지.

  모두 일리가 있는 견해이다. 하지만, 어쩌면 『대학』의 학문 정신이 쇠락한 데에 문제의 원천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대학장구(大學章句)』에 수록된 「독대학법(讀大學法)」을 보면, 『논어』와 『맹자』는 성현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을 다룬 언설들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을 뿐 유학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이론서는 아니다. 『논어』와 『맹자』를 읽고 구절구절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문학적인 감동과 철학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는 있을지언정 과학적인 사유를 얻을 수는 없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는 보편적인 테제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는 『대학』이야말로 주자학(朱子學)의 학문 정신이 발산되는 핵심적인 문헌이었다. 사서(四書)의 첫머리에 『대학』이 놓였다는 것은 이처럼 공자와 맹자의 언설을 『대학』의 테제로 해석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천명을 뜻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대학』이었다. 『대학』이 스러진다면 『논어』와 『맹자』는 언제든지 ‘공자왈맹자왈’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었다. 『논어』와 『맹자』는 과거의 고전이고 과거의 고전을 해석하는 현재의 사회과학이 곧 『대학』이었기에, 실천적인 지성인들은 자기 시대의 『대학』을 창출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에서 주희(朱熹)가 『대학장구』를 지어 『대학』을 표장한 이래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짓고 구준(丘濬)이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지었던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이이(李珥)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짓고 권상신(權常愼)이 『국조대학연의(國朝大學衍義)』를 짓고 송병선(宋秉璿)이 『무계만집(武溪謾輯)』을 지었던 것은 끊임없이 자기 시대의 『대학』을 창조하고자 하였던 유교 사회의 오랜 열망을 보여 준다. 그 도도한 흐름이 급기야 8․15 해방 후에도 이어져 이관구의 『신대학』이 출현한 것이다.

  『신대학』은 형식상 <총론(總論)>,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격물(格物)>, <치지(致知)>, <이재(理財)>,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결론(結論)> 등 총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말민초(淸末民初)의 사상가 양계초(梁啓超)의 주요 저술인 『신민설(新民說)』과 그 밖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의 주요 작품에서 내용을 취하였다. 양계초의 입론을 해방 후 한반도의 역사적 상황에 적용하여, 근대 국민국가 수립의 기본 전제를 민족주의의 형성에서 구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남북분단과 이에 편승한 친미(親美)와 친소(親蘇)의 사상분열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북분단과 사상분열의 본질이 외세에 의존하는 비주체성이라고 보고 한반도의 전체 주민이 새로운 국민 도덕, 국민 정신, 국민 지식을 갖추어 신민(新民)으로 거듭나기를 희구(希求)하였다. 『대학』의 사유 형식과 양계초의 사상 내용으로 8ㆍ15 해방 후 한국 사회에 민족(民族)과 신민(新民)의 메시지를 전한 『신대학』,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나라 주자학 전통의 현대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1945년 이후에도 시대와 씨름하는 유학은 가능했다는 것, 진정한 유학은 어쩌면 과거를 다루는 고전인문학의 모습보다 현재를 다루는 사회과학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잃어버린 현재성을 되찾지 못하는 고전학은 언제든지 ‘공자왈맹자왈’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런 생각을 해 보며 21세기 한국 지성사에도 다시 『신대학』과 같은 지적인 도전이 나오기를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