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되는 즈음 읽을만한 고전으로는 어떤 책이 있을까? 필자는 조선후기의 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6)이 쓴 『택리지(擇里志)』를 추천하고 싶다. 『택리지』는 실학의 열풍이 우리의 국토와 역사, 문화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지던 시기, 우리의 산천과 그 곳에서 살아갔던 사람들까지를 담아낸 책이기 때문이다. 이중환의 호는 청담(淸潭) 또는 청화산인(靑華山人)이며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참판 진휴(震休)의 아들로 성호 이익의 재종손(再從孫)이자 남인의 핵심 집안이었다. 그가 살아간 영조 시대는 집권세력인 노론의 탄압을 받아 남인이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시대였다. 『택리지』의 발문에 ‘떠돌아다니면서 살 집도 없어서’라는 표현에서 그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중환은 불우한 환경을 탓하지만은 않았다. 정치적으로 실세(失勢)했음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우리 국토 곳곳을 누비면서 그곳의 산수와 생리(生利), 인심을 관찰하여 『택리지』라는 불후의 저술을 남겼다. 『택리지』를 저술한 정확한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저자 자신이 쓴 발문에서 ‘내가 황산강(黃山江) 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어 …… 우연히 논술하였다’고 하면서, 말미에 신미년(1751년)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저자가 61세 되던 무렵에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택리지』는 크게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총론(總論)의 네 분야로 나누어져 있다. 「사민총론」에서는 사대부의 신분이 농공상민(農工商民)과 달라지게 된 원인과 내력을 설명하였고, 「팔도총론」에서는 우리 국토의 역사와 지리를 개관한 다음, 당시의 행정구역인 팔도의 산맥과 물의 흐름을 말하고 관계있는 인물과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팔도총론」의 내용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곤륜산 한 지맥이 대사막의 남쪽으로 뻗어 동쪽으로 의무려산이 되었고, 여기에서부터 크게 끊어져 이에 요동(遼東)의 들이 되었다. 들을 지나서 솟아 백두산이 되었는데, 『산해경』에서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라는 것이 이곳이다. 정기가 북쪽으로 천 리를 달려가며 두 강을 끼었고, 남쪽을 향하여 영고탑(寧固塔)이 되었으며, 등 뒤로 한 가지를 뻗어 조선 산맥의 머리가 되었다. 팔도가 있는데, 평안도는 심양과 이웃하였고, 함경도는 여진과 이웃하였으며, 다음으로 강원도는 함경도와 이어졌다. 황해도는 평안도와 이어졌고, 경기도는 강원도와 황해도의 남쪽에 있다. 경기도의 남쪽은 충청도 및 전라도이며, 전라도의 동쪽은 바로 경상도이다. 경상도는 바로 옛날 변한ㆍ진한 땅이었고, 경기ㆍ충청ㆍ전라도는 바로 옛 마한과 백제 땅이었다. 함경ㆍ평안ㆍ황해도는 바로 고조선ㆍ고구려 땅이었고, 강원도는 별도로 예맥 땅이었다. 그 흥하고 멸망함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나라 말기에 태조 왕건이 나가서 삼한을 통합하여 고려를 세웠으며, 우리 왕조가 운(運)을 계승하였다. 동ㆍ남ㆍ서쪽은 모두 바다이고, 홀로 북쪽 한 길만이 여진ㆍ요동ㆍ심양과 통한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으며, 그 백성은 유순하고 근신한다. 길이는 3천리에 걸쳐 있으나 동서는 천 리도 못된다. 바다와 닿은 남쪽은 (중국)절강성의 오현ㆍ회계현의 사이와 맞닿을 수 있다. 평안도의 북쪽 의주는 국경 수읍(首邑)이며, 대략 (중국)청주(靑州)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대저 일본과 중국의 사이에 있다. [崑崙山一枝 行大漠之南 東爲醫巫閭山 自此大斷 是爲遼東之野 渡野 起爲白頭山 卽山海經所謂不咸山 是也 精氣北走千里 挾二江 向南爲寧固塔 背後抽一枝 爲朝鮮山脈之首 有八道 曰平安 隣瀋陽 曰咸鏡 隣女眞 次則曰江原 承咸鏡 曰黃海 承平安 曰京畿 在江原黃海之南 京畿之南則曰忠淸及全羅 全羅之東 卽慶尙也 慶尙 卽古卞韓辰韓地 京畿忠淸全羅 卽古馬韓百濟地 咸鏡平安黃海 卽古朝鮮高句麗地 江原別爲濊貊地 其興滅未詳 唐末王太祖 出而統合三韓 爲高麗 而我朝繼運矣 東南西皆海 獨北一路 通女眞遼瀋 多山少野 其民柔謹 局促長亘三千里 東西不滿千里 際海而南者 可値浙江吳會之間 平安之北義州 爲界首邑 約可當靑州 國大抵 在日本中國之間]

▶ 《朝鮮疆域總圖》(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에 실려 있는 [朝鮮全圖]
이중환은 백두산이 조선 산맥의 머리가 되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팔도의 각 지역에서 존재했던 국가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어서 고려 태조의 삼한 통합, 조선의 고려 계승 등 역사적 뿌리를 기록하고 있다. 팔도에 관한 기록이면서도 우리 민족의 뿌리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는데, 그래서인지 단군에 관한 기록도 매우 자세하다.
옛날 요임금 때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평안도 개천현 묘향산 박달나무 아래 석굴에서 변화하여 태어났다.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고 마침내 구이(九夷)의 군장이 되었는데, 연대와 자손은 기록할 수 없었다. 후에 기자가 나와서 조선에 봉해져서 평양을 도읍으로 삼고 손자 기준(箕準)에까지 이르렀는데, 진나라 때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축출되었다. 바다를 건너 전라도 익산군에 도읍을 옮기고, 이름하기를 마한이라 하였다. 기씨 땅의 경계는 『사기(史記)』에 상세하지 않지만, 진한ㆍ변한과 더불어 이를 삼한이라 하였다. 혁거세는 한 나라 선제 때 일어나, 경상도를 다 점유하였다. 진한ㆍ변한 여러 지역을 신하로 복종시켜, 신라라 이름 하고 경주를 도읍으로 삼았다. 박(朴)ㆍ석(昔)ㆍ김(金) 세 개 성씨가 다시 번갈아가면서 왕이 되었다. 위씨는 한나라 무제 때 멸망했다. 한나라에서 백성만 옮겨가고 땅은 버림에 미쳐, 주몽이란 자가 말갈로부터 평양에 근거를 두어 고구려라 이름하고 칭하였다. 주몽이 죽자 그의 둘째 아들 온조가 또 한수(漢水) 이남에 나누어 근거하여, 마한을 멸망시키고 백제라 이름 하였으며 부여를 도읍으로 삼았다.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당나라 고종 때 멸망하였다. (당나라에서) 땅을 버리고 철수하여 돌아가자, 두 나라 땅은 다 신라로 들어왔다. 말기에 궁예와 견훤이 나눈 바가 되었는데, 고려에 이르러 그것을 통일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건치연혁의 대략이다. [古堯時 有神人 化生於平安道价川縣妙香山檀木下石窟中 名曰檀君 遂爲九夷君長 年代子孫 不可記 後箕子出 封于朝鮮 都平壤 至孫箕準 秦時 爲燕人衛滿所逐 赴海遷都於全羅益山郡 號爲馬韓 箕氏地界 不詳於史氏 與而辰卞 是爲三韓 赫居世 興於漢宣帝時 盡有慶尙道 臣服辰卞諸地 號新羅 都慶州 朴昔金三姓 更迭而爲王 衛氏 亡於漢武帝時 及漢移民棄地 有朱蒙者 自靺鞨 據平壤 號稱高句麗 朱蒙沒 其次子溫祚 又分據漢水以南 滅馬韓 號百濟 都扶餘 高句麗與百濟 俱滅於唐高宗時 棄地撤歸 二國地 盡入新羅 末爲弓裔甄萱所分 至高麗一之 此我國建置沿革之大略也]
이중환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역사를 언급한 다음에는 삼한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신라는 진한과 변한의 여러 지역을 복속했고, 백제가 마한을 멸망했다는 역사 인식은 조선후기 남인 실학자들의 대체적인 역사인식이었다. 「팔도총론」의 후반부는 고려의 역사가 중심을 이룬다.
신라 이전은 삼국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하여 문적(文蹟)이 적어, 고려부터 비로소 기록할 수 있었다. 고려 때는 사대부의 이름이 아직 크게 세워지지 않아서, 서리(胥吏)로부터 경상(卿相)이 된 자가 많이 발생했다. 한 번 경상이 되면 그의 아들과 손자도 사대부가 되어서 다 경성(京城)에 집을 두게 되니, 경성이 마침내 사대부의 연못과 늪이 되었다. 외읍인(外邑人)은 드물게 조정에 등용된 자가 있었는데, 쌍기가 과거 제도를 만들어 선비를 취함에 미쳐서는 외방인도 점점 조정에서 두드러진 벼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북에는 무신(武臣)이 많고, 동남에는 문사가 많았다. 말기에 문풍이 크게 떨침에 미쳐서는, 간간이 중원(中原)에서 행한 과거에 합격한 자도 있었는데, 이것은 원나라와 통한 것의 효과였다. 지금에 이르러 세상에 대족(大族)으로 칭해지는 것은, 고려 경상의 후예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사대부의 자손이 갈라진 내력도 고려부터 비로소 기술할 수 있었다. [新羅以前 三國戰爭 不休 然文蹟少 自高麗 而始可述矣 高麗時 士大夫之名 未大立 多起自胥吏而爲卿相者 一爲卿相 則其子與孫 爲士大夫 咸置家於京城 京城遂爲士大夫淵藪 而外邑人 罕有登于朝者 及雙冀制科擧取士 外方人稍稍得顯仕于朝 然西北多武臣 東南多文士矣 及季世文風大振 間有中中原制科者 此通元之效也 至今 以大族稱於世者 多高麗卿相之後裔 則士大夫之胄派來歷 自高麗 而始可述矣]
위에서 보듯 『택리지』는 지리지이면서도, 산수와 역사, 인물, 사건을 연결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택리지』를 인문지리서의 완성판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이다. 「팔도총론」에 이어서는 「복거총론」이 나온다.「복거총론」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조건을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의 네 가지를 들어서 설명하였는데, 인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상업과 경제에 관한 내용도 풍부히 설명하고 있다. 그럼 『택리지』에서는 어떤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표현하였을까? 저자는 살 만한 곳을 택하는 데 있어 첫째 조건으로 ‘지리’를 꼽았다. 여기서 지리라는 것은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한 곳과 같은 현대적 의미의 지리가 아니라 풍수학적인 지리를 의미한다. 즉 ‘지리를 논하려면 먼저 수구(水口)를 보고, 다음에는 들판과 산의 형세를, 이어 흙빛과 물의 흐르는 방향과 형세를 본다’고 기록하였다. 이어 ‘생리’를 살 만한 곳의 주요 조건으로 들었다. ‘재물이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닌 까닭으로 기름진 땅이 첫째이고,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물자를 교류시킬 수 있는 곳이 다음이다’라고 생리를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기름진 땅으로는 전라도의 남원, 구례와 경상도 성주, 진주를 제일로 꼽았으며, 특산물로는 진안의 담배, 전주의 생강, 임천과 한산의 모시, 안동과 예안의 왕골을 들었다. 세 번째로는 ‘인심’을 들었다. 저자는 ‘그 곳 풍속이 좋지 못하면 자손에게도 해가 미친다’ 하여 풍속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팔도의 인심을 서로 비교하여 기록하였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서민과 사대부의 인심이나 풍속이 다른 점을 강조하면서, 당쟁의 원인과 경과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여 인심이 정상이 아님을 통탄하였다. ‘오히려 사대부가 없는 곳을 택해서 살며 교제를 끊고 제 몸이나 착하게 하면 즐거움이 그 중에 있다’고 한 대목에서도 보이듯이 이중환에게 있어서 집권 사대부의 권위주의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마지막 조건으로는 ‘산수’를 들면서 ‘집 근처에 유람할만한 산수가 없으면 정서를 함양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저자는 산수의 경치가 훌륭한 곳으로는 영동을 으뜸으로 삼았다. 『택리지』가 완성되자 여러 학자들이 서문과 발문을 썼으며, 많은 사람이 이책을 베껴서 읽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책의 제목이 『팔역지(八域志)』, 『팔역가거지(八域可居志)』,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진유승람(震維勝覽)』,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형가요람(形家要覽)』 등 10여 종이나 있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택리지』를 필사하면서 제목을 자신의 취향대로 붙인 것이다. ‘동국산수록’, ‘진유승람’ 등은 산수를 유람하기에 좋다는 의미에서, ‘동국총화록’은 우리나라의 물산이 종합되었다는 의미로, 상인들이 붙인 이름으로 짐작된다. ‘형가요람’은 풍수지리에 익숙한 사람이 지은 제목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다양한 제목은 『택리지』가 여러 분야의 사람들에게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택리지』가 저술된 시기 조선 사회는 사회경제적 성장과 함께 국학 연구 분야에도 큰 발전이 있었던 시기였다. 사대부 학자 중에는 금강산 등 우리나라 산천을 여행하는 붐이 일고 각종의 기행문이 기록되었다. 『택리지』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국토를 여행하는 시대분위기와 맞물리면서 널리 유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2012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새해에는 『택리지』를 들고 전국 답사에 나서기를 권한다. 우리나라 전국의 산수와 풍물, 인심을 만나면서, 역사와 전통의 멋을 음미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