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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天地)와 바람과 나

천지(天地)와 바람과 나

2011. 6. 6. (월)

  우리는 남들과 모여서 즐거울 때 나와 남이란 구별을 잠시 잊는다. 나와 남을 의식하는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몸과 마음이 경직되어 불편하다. 또한 우리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감탄할 때 자기 존재를 잊고 경치와 하나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자연의 장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이 분다.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런 자취도 없으니, 참으로 덧없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가 ‘나’라고 단단히 믿는 이 육신도 덧없기는 바람과 다를 바 없다. 나를 자기 육신에 국한하는 견고한 집착을 버리고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우리네 삶이란 것이 늘 위태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맹춘(孟春 음력 1월) 초하루에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는데 썰렁한 바람이 불어와 뜰을 배회하였다. 한 사람이 말하였다.
  “이상해라, 바람이여! 바람은 무슨 기(氣)인가?”
  내가 대답하였다.
  “천지 사이에 가득 찬 것은 하나의 기(氣)일 뿐인데 기는 모이고 흩어짐이 있고 오르내림이 있습니다. 대저 바람이란 기의 자취인데 무엇이 이것을 불게 하는가? 이(理)가 스스로 그러한 것입니다.”
하고, 이어 손을 들어서 그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그대는 이 손을 아시오?”
  그가 말하였다.
  “손입니다.”
  내가 말하였다.
  “손이 손인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는 고요했고 지금은 움직이며 조금 전에는 굽혔고 지금은 폈으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가 말하였다.
  “기(氣)입니다. 기입니다.”
  내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기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늘입니다. 하늘은 무엇인가? 기일 뿐이고 리(理)일 뿐입니다. 하늘에 리와 기가 있어 만물이 생겨나니, 만물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면 만물은 제각각 만물일 뿐이지만 하늘의 관점에서 만물을 보면 만물도 하늘입니다. 그러니 바람이 내가 아니며 내가 바람이 아니라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두 사람이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였다.
  “아침에 밖에서 오는데 길에 있는 자들이 모두 남 아님이 없었습니다. 이제 주인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신이 아득하여 다르게 느껴집니다. 나 자신을 찾아도 스스로 찾을 수 없거늘 누가 남이겠습니까.”
  두 사람이 나간 뒤에 문을 닫고 이 말을 기록한다.

 

[孟春之朔, 二客過余, 有風肅然, 徘徊中庭. 客曰, “異哉風, 風何氣哉!” 答曰, “盈天地之間, 一氣耳, 氣有聚散有升降. 夫風者, 氣之迹也. 孰披拂是, 理自爾也.” 擧手示客曰, “客知此手?” 客曰, “手也.” 曰, “手之爲手, 固也. 向也靜而今也動, 向也屈而今也伸. 所以者何?” 答曰, “氣哉氣哉!” 余曰, “然. 氣非我有也, 天也. 天者何? 氣而已, 理而已. 天有理氣, 萬物化生. 在物自觀, 物各物也, 以天觀物, 物亦天也. 又惡知風之非我我之非風!” 二客相顧歎曰, “朝來自外也, 在路者無非人, 今聞主人之敎, 汒焉異之, 求我身而不自得, 孰爲人哉!” 客出, 閉門而記其說.]

 

- 권필(權韠)  <잡술(雜述)> 《석주집(石洲集)》

 

 

                ▶ 권필(權韠)의 <잡술(雜述)> 전문

[해설]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의 글이다. 석주는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목릉성제(穆陵盛際)로 불린 선조(宣祖) 때에도 시로는 단연 당대의 으뜸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강직한 성품에 야인기질이 강했던 그는 과거에 뜻이 없어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야인으로서 명나라 사신을 접반하는 문사(文士)로 뽑혀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광해군의 처남인 권신 유희분(柳希奮)을 풍자하는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다가 곤장을 맞고 귀양길에 올랐다.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친구들이 차려준 술자리에서 통음하고 이튿날 세상을 떠났으니, 시인의 마지막 또한 그의 삶만큼이나 극적인 것이었다.

  손의 움직임으로 바람의 원리를 설명한 것은 시인다운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발상이다. 손을 굽혔다 펴는 것을 가지고 기(氣)의 움직임을 설명한 것은 음양(陰陽)을 기의 굴신(屈伸)으로 보는 《주역(周易)》의 사상과 같다. 우주에는 하나의 기(氣)가 있을 뿐인데 이 기가 고요하면 음(陰)이요 움직이면 양(陽)이며, 움츠려들면 음이요 펴지면 양이다. 밤은 음이요 낮은 양이며, 봄 여름은 양이요 가을 겨울은 음이다. 즉 우주의 모든 현상이 바로 음양의 운동 과정인 것이다.

 

  이 글에서 작자는 리(理)와 기로 우주의 현상을 설명했지만 그 사상은 오히려 불교나 노장(老莊)에 가깝다. 여기서 리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의 주재성(主宰性)을 잃고 기의 운동 원리로만 존재할 뿐이다. 

 

  성리학에서는 우주의 근원자를 리(理)라고 한다. 리가 우주의 유일한 실존이고, 리가 기를 통하여 자기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 우주의 삼라만상이다. 그런데 작자는 ‘하늘은 무엇인가? 기일 뿐이고 리(理)일 뿐’이라 하였으니 정이천(程伊川)이 ‘하늘이 곧 리이다.[天卽理]’ 라고 한 명제와 어긋나고, 다시 ‘하늘에 리와 기가 있어 만물이 생겨난다’ 하였으니 하늘이란 근원자가 리와 기를 가지고 있는 셈이 되었다. 하늘이 근원자가 되고 리와 기가 근원자의 손발이 된 듯한 느낌이다. 논리가 다소 거칠고 비약적이다. 학자의 글이 아니라 분명 시인의 글이다.

 

  만물은 모두 하늘에서 나온 것이니,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 전체가 하나의 하늘일 뿐이다. 각양각색의 개체로 나뉘어 있는 현상 전체가 그대로 하늘인 것이다. 따라서 바람과 나도 하늘이 자신을 나타내어 보인 현상일 뿐이다.


  중국의 한 선사(禪師)는 “천지가 나와 같은 뿌리이고 만물이 나와 한 몸이다.[天地與我同根,萬物與我一體]” 하였다. 생각해 보면, 만물이 정녕 서로 아무 연관이 없는 각개라면 서로를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한편 우주가 그냥 하나일 뿐이라면 만물이 서로를 보고 인식할 수 없지 않을까. 아! 본래 하나가 아니면 서로를 느낄 수 없을 것이요 둘이 아니라면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니, 삼라만상을 펼쳐서 자신을 현현(顯現)하고 있는 하나인 근원자의 조화가 참으로 신묘하다.

  대개 종교의 가르침은 자기를 버리고 천지의 본성, 우주의 근원자와 합일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그것이 기독교의 신이든, 불교의 불성이든, 유교의 천리(天理)이든, 근원자에 합일하려면 사사로운 나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대개 나의 영생을 얻고자 한다. 자기가 나라고 인식하는 바로 그 사사로운 나를 버려야 근원자에 합일할 수 있는데 오히려 나를 더욱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인적위자(認賊爲子), 즉 도적을 자식으로 잘못 안다고 한다.

  주자(朱子)는 “‘천지의 본성이 바로 나의 본성이니, 어찌 죽는다고 해서 없어질 리 있겠는가’라고 한 말은 그르지 않다. 그렇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이 천지를 위주로 한 것인가? 나를 위주로 한 것인가?[所謂‘天地之性, 即我之性, 豈有死而遽亡之理!’, 此說亦未爲非, 但不知爲此說者以天地爲主耶?以我爲主耶?]” 하였다.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영생을 바라는 마음에서 천지의 본성과 자기의 본성이 같다고들 말한다. 근원자에 합일하려고 하면서 사실은 사사로운 나를 더욱 고집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종교인들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욱 집착이 강하다. 진정으로 천지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나 자신을 찾아도 스스로 찾을 수 없거늘 누가 남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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