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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서울, 조선 선비가 중국 선비에게 들려준 학문의 비결

1889년 서울, 조선 선비가 중국 선비에게 들려준 학문의 비결
                                                                           2011. 5. 30. (월)

  예나 지금이나 외국 사람과 만나 학문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진지한 학문적인 대화는 가벼운 날씨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법, 오늘만 지나가면 곧 잊혀질 무상한 날씨 이야기와 달리 신실하게 교감을 나눈 학문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에 남아 영원한 현재를 살아간다. 하물며 역사와 문화가 다른 외국 사람과 주고받는 학문 이야기의 여운은 더 짙고 더 깊을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외국 사람과 학문적인 대화를 나누었던 공간은 주로 우리나라 바깥이었다. 중국과 일본에 파견된 조선의 사절단은 현지에서 여러 지식인들과 만나 주자학, 양명학, 한학(漢學), 고학(古學) 등을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공동 문어였던 한문을 이용해 나눈 필담은 섬세하고 정밀한 학술적 대화를 담을 수 있는 유리한 장치였다.
  그런데, 외국인과의 학술 교류가 항상 우리나라 바깥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이후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청나라 세력이 장기간 조선에 정치적 영향을 미침에 따라 서울에서는 조선과 청 사이의 문화ㆍ학술 교류가 활발히 일어났다. 조선 선비 박승동이 1889년 서울에서 청나라 선비 손경종(孫慶鍾)을 만나 필담을 나눈 것은 이러한 교류의 한 장면이었다. 둘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청나라 사람 손경종(孫慶鍾)은 호는 근당(勤堂)으로 손규(孫揆)의 후손이다. 옛 제나라 도읍 남문 밖에 거주한다고 한다. 원세개(袁世凱)의 막료로 우리나라에 와서 계속 머무르고 있다. 기축년(己丑年 : 1889년) 봄 내가 서울에서 관상현(觀象峴)에 숙소를 잡았는데 근당이 찾아와 필담한 것이 이와 같다.
  (중략)
  손경종 : 육경(六經)과 백가(百家)는 제가 이미 대략 섭렵했습니다. 공부하지 못한 것은 조선 유학자의 이론입니다. 오늘 조선 선유들의 경의설(經義說)을 듣고 배움을 더하고 싶습니다.
  박승동 : 우리나라 선유들의 경의와 예설을 실은 현전 문적들이 문원(文苑)에 쌓여 집집마다 보장(寶藏)된 지 지금 오백 년이 더 됩니다. 그 법칙적이고 논리적인 논의가 천하에 전파되어 갈 만하지만 단지 우리나라가 구석에 위치해서 널리 퍼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늘이 감춘 곳의 지극한 보배가 천하에 천명될 기약이 없었음을 탄식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지금 천하의 선비께서 다행히 한두 가지 논의하시니 제가 비록 노망(鹵莽)하지만 질문의 조항에 응해 대답하겠습니다. 모두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중략)
  손경종 : 제가 제(齊)나라에서 태어나 제(齊)와 노(魯) 사이에서 노닐며 조금 학문하는 방도를 압니다. 지금 멀리 다른 나라에 와서 외롭고 쓸쓸해 다시 공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걱정되지 않으나 이것이 걱정입니다.
  박승동 : 우리나라 이문순(李文純 : 이황)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道)는 일상에서 유행하니 어디에 가든 없는 곳이 없다. 따라서 이치가 없는 곳이 한 자리도 없으니 어느 곳인들 공부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경각에도 혹여 쉬는 곳이 없다. 따라서 이치가 없는 때가 한 순간도 없으니 어느 때인들 공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손경종 : 거경(居敬)과 궁리(窮理), 두 가지 설은 정주씨(程朱氏)가 창립한 큰 가르침입니다. 배우는 사람이 거경과 궁리 중에서 잠시라도 어느 것을 먼저해야 하겠습니까?
  박승동 : 퇴옹(退翁 : 이황)이 율옹(栗翁 : 이이)에게 답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궁리와 거경은 비록 서로 수미(首尾)가 되지만 사실은 두 가지 공부입니다. 절대로 둘로 나누었다고 근심하지 말고 반드시 상호간에 진보하는 것으로 법칙을 삼으세요. 기다리지 말고 지금 곧장 공부하세요. 지체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처한 곳에 따라 즉시 힘을 쏟으세요. 마음을 비우고 이치를 보되 먼저 자기 생각으로 고집해 정하지는 마세요. 점점 쌓여 순결히 익어가리니 세월을 책하지 말고 평생의 사업으로 조치하세요. 이치[理]가 융회함에 이르고 경건[敬]이 전일함에 이르는 것은 모두 조예가 깊어진 뒤 스스로 터득할 뿐입니다."
  손경종 : 아아! 책을 끼고 학업을 행한 지 20년 동안 사무에 통달하지 못했고, 해외에서 병기를 잡으며 다시 책 속의 성현과 접하지 못했습니다. 군문 침상에서 엄한 스승의 훈계를 추념하니 거의 하늘가 꿈 속의 일 같습니다. 존양(存養)의 공부와 격치(格致)의 정성에 관해 질의할 곳이 없었는데 뜻하지 않게 해외에서 이렇게 훌륭한 스승을 얻었으니 부유하는 인생이지만 낙심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박승동 : 옛날 현인은 '자기 마음이 엄한 스승'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통해 말한다면 다니는 곳마다 절로 엄한 스승이 있을 것이니 하필 해외의 구구한 곳에서 훌륭한 스승을 구하겠습니까? 하물며 저는 스승이 되기 부족한 사람인데요? 그렇지만 저도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일상의 사물이 마음으로부터 명령을 좇아 공사(公私), 시비(是非)를 살펴 행한다면 어찌 스승이 없음을 근심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자기 마음이 스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략)
  손경종 : 옛 사람은 독서를 부지런히 해서 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사람은 옛 사람처럼 독서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도학이 옛날처럼 밝지 못합니다. 도학을 밝히고 싶으면 단지 독서를 부지런히 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근당(勤堂)'이라고 호를 지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승동 : 이문성(李文成 : 이이) 선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후세에 도학이 밝혀지지 않고 행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독서를 널리 하지 못함을 근심할 것이 아니요 이치를 정밀하게 살피지 못함을 근심할 일이다. 지견이 넓지 못함을 근심할 것이 아니요 실천이 독실하지 못함을 근심할 일이다. 정밀하게 살피지 못하는 것은 요점을 헤아리지 못함에서 연유하고, 실천이 독실하지 못한 것은 정성을 다하지 못함에서 연유한다. 요점을 헤아린 뒤에야 그 맛을 알 수 있고, 그 맛을 안 뒤에야 그 정성을 다할 수 있다." 지금 길손의 ‘근(勤)’이라는 호를 통해 이치를 살핌이 정밀하고 실천이 독실하며 요점을 헤아리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할 근(勤)의 뜻이 아주 좋으니 노력하시지요.
  손경종 : 제가 듣기로는 조선은 예의지방(禮義之邦)이라 하는데 이른바 예의는 남녀의 구별이 첫 번째입니다. 지금 서울의 거리를 보면 남녀가 어깨를 스치고 걸어갑니다. 이와 같은데 예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중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녀가 어지럽게 섞이는 일이 없습니다. 길가에서 구경하고 노는 사람도 남자는 남자와 있고 여자는 여자와 있어서 원래부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지 않습니다. 시장과 거리에는 여인이 나가지 않습니다.
  박승동 : 서울 거리에 이른바 여자가 얼굴을 드러내고 팔을 휘저으며 오고 가는 사람은 모두 천한 아랫사람의 식구인데 예의가 미치지 못합니다. 장옷을 뒤집어쓰고 다니는 사람도 모두 천한 무리입니다. 어찌 논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남녀의 구별은 전적으로 사족(士族)에게 있습니다. 안의 말은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바깥 말은 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상복을 입는 삼 년 동안은 부부와 서로 대면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예의지방이라 칭찬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조문정(趙文正 : 조광조) 선생이 대사헌이 된 지 사흘만에 서울 거리는 천한 무리들도 남녀가 기꺼이 다른 길을 걸었고 지금껏 칭찬하고 있습니다. 회전(會典)은 곧 중국에서 예를 제정한 책인데 지금 듣기로 부모상이 먼 곳에 있으면 사람을 시켜 부음을 통하는 일이 없고 관아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상을 당한 지 백일이 지나면 공무를 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회전에서 예를 제정한 뜻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 박승동(朴昇東), 「영해필(瀛海筆)」,『미강집(渼江集)』

 

 ▶「영해필(瀛海筆)」_ 일부 발췌 _ 한칸 들여쓴 부분이 손경종의 질문임

 

※ 원문은 홈페이지 > 알림마당 > 고전포럼 > 고전의향기 에서 서비스 될 예정입니다.

[해설]

  1882년 조선 군인들의 봉기, 세칭 임오군란은 한국 근대사의 원초적인 비극을 마련한 운명의 사건이었다. 그것은 무장한 군인들이 서울에서 일어나 대신들을 살상하고 궁궐에 난입하여 왕후를 수색했던 사건, 군인 세력을 적절히 이용한 흥선대원군의 입궐과 더불어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사건, 바다 건너 서울에 들어온 청나라 세력에 의해 다시 흥선대원군 정권이 무너진 사건이었다. 임오군란의 비극은 김동인이 <젊은 그들>에서 묘사했듯 흥선대원군을 추종한 비밀결사체의 몰락으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었다. 1894년의 갑오변란과 1895년의 을미사변은 모두 임오군란의 재연(再演)이자 재현(再現)이었다. 10여 년이 지나 궁궐은 또다시 난입당했으며 흥선대원군은 또다시 입궐했으며 왕후는 또다시 수색되었고 끝내 시해되었다. 임오군란을 벤치마킹한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공작이었다.

  임오군란은 정치적 재앙이었지만 이를 배경으로 청나라 세력이 조선에 들어옴에 따라 서울에서는 문화적인 한중교류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오장경(吳長慶), 원세개(袁世凱) 등 청군의 우두머리 밑에는 한인(漢人) 출신 문사들이 막료(幕僚)로 봉직하고 있었고, 이들 한인 문사들과 조선 사대부 사이의 학술적, 문예적 교류가 지속적으로 서울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1880년대 서울에서 조선과 청의 교류는 1590년대 서울에서 조선과 명의 교류가 다시 환생하는 기운마저 없지 않았다. 임진왜란기 조선의 문인 이정구(李廷龜)가 명나라 송응창(宋應昌)과 더불어 <대학>을 강론하고 그 결과물을 <대학강어(大學講語)>로 정리했던 것은 조선 사대부의 성리학적 <대학> 이해와 명나라 문사들의 양명학적 <대학> 이해가 학술적으로 만난 중요한 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1880년대에도 이러한 학술 교류가 형성될 수 있는 여건은 충분히 조성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청의 문사들과 만나 교류했던 사람들은 대개 서울에 사는 경화사족과 그들의 문객이었다. 청군과 군함을 함께 타고 조선에 들어왔던 김윤식(金允植), 청군을 공식적으로 영접하였고 청군 내부의 많은 문사들과 교유했던 김창희(金昌熙), 시에 약한 김창희를 위해 많은 시를 대작하며 김창희의 교유를 지원했던 조면호(趙冕鎬), 김윤식의 주선으로 청의 문사 장건(張謇)과 만나 훗날 청나라에 망명하여 장건의 고향에서 문필 생활을 하는 김택영(金澤榮) 등이 우선 눈에 띄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교류에 동참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는 과거 시험이 자주 시행되어 어느 때보다 지방 사족의 서울 체류가 빈번했기 때문에 경화 사족뿐만 아니라 지방 사족도 청나라 문사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1889년 박승동(朴昇東 1847~1922)과 손경종의 만남은 조선의 지방 선비와 청나라 문사의 교류라는 점에서 상당히 주목되는 사건이다. 박승동은 경상도 대구에서 서찬규(徐贊奎 1825~1905)를 사사한 선비였는데, 서찬규가 헌종ㆍ철종대 조선 낙학(洛學)의 종장인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유력한 문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서울 사정에 밝았고 서울에 자주 체류하였다. 그가 손경종을 어떤 경위로 만났는지는 미상이지만 지방의 평범한 선비인 그가 공맹(孔孟)의 고향에서 온 중국인과 만나 학술적인 필담을 나눈 것은 그 자체로 전례 없는 일이었다. 필담의 내용도 손경종에게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이황과 이이 등의 가르침을 전해 주면서 손경종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라, 말하자면 중국의 학문을 배우는 자리가 아니라 조선의 학문을 가르치는 자리로서의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조선과 중국의 교류에서 항상 조선이 중국에 가서 무엇을 배워 오는 상황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상황도 있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끝에 가서 조선과 중국의 풍속이 과연 문명의 본질이라 할 예의를 실현하고 있느냐는 문제로 신경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우호적인 필담이었다. 이들의 필담은 과연 이 시기 조청 학술교류의 전체적인 흐름 위에서는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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