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은 1905년 대한제국 시절 (舊)벨기에 영사관으로 쓰였던 건물이다. 아직도 그때의 모습이 남아 실내기둥과 벽난로가 세월의 나이테를 느끼게 해준다. 미술관과 오래된 건축물이 만나 묘한 매력을 풍기며 제법 전시 관람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인식조차 못 할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인터넷을 주로 이용하는 젊은층조차 신조어에 대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중의 따라 하기를 유도했던 트렌드의 유통기간은 일 년에서 채 몇 달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또 다른 유행에 밀려 폐기 처분된다. 너무나 빠른 속도에 종종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시점, 어떤 환경에 있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워쇼스키 형제가 만든 메트릭스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는 현실과 가상세계를 오고 가다 나중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이 가상세계인지 가상세계가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개봉한 영화였다. 인터넷이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다. 놀랍게도 영화의 내용처럼 우리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전해준 불을 만나 새로운 세상을 열듯, 인터넷을 통해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이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여론과 유행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세상에 살게 되었다. 영화 속 네오가 어떤 것이 진짜 세상인지 혼란스러워하듯이 우리도 어떤 것이 자연이고 어떤 것이 인공인지 모르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인공 꽃이 마치 살아있는 듯 꽃잎을 움직이는 팬시 제품을 사무실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제일 처음 밟는 것이 흙이 아니라 흙 알갱이처럼 보이게 만든 오톨도톨한 아스팔트이다. 이렇게 인공의 창조물들은 자연처럼 보이기 위해 모습을 흉내 낸다. 어떨 때는 자연보다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인공의 제품들이 나오는 것을 보며 가끔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한다.
오래된 미래라는 이름으로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를 보고 있으면 과거의 자연이 교묘하게 인공의 것으로 대체되었음을 목격하게 된다. 현대사회가 직면한 환경오염과 같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허물어져 어떤 것이 진짜인지 모르는 서글픈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과학 발전은 인간과 동식물의 유전자 지도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모든 것을 통제하고 조절해보려는 욕망은 자연과 인공, 생명과 무생물의 경계조차 희미하게 만들었다. 이번 전시는 그런 맥락에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인간의 욕망으로 박제된 자연과 변종된 생명의 동거라는 불편한 진실을 환기시켜준다.
전시를 보고 있자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래의 사물의 모습이 잘라지고 해체된 모습에서 왠지 모를 거부감이 느껴진다. 그러한 불편함은 전시관을 벗어나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 곳곳에는 이러한 변화되고 박제된 자연이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인식조차 못 하고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자연의 본 모습과 얼마나 많은 인공적인 변형된 구조물에서 살고 있는지 이번 전시를 통해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1층 복도에 화면으로 전시된 김주연 작가의 작업에 대한 기록영상을 보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온갖 것들이 다 빠져나가고 마지막 남은 희망을 만난 느낌이다. 18,000부의 신문을 쌓아 하나의 건물 같은 구조를 만들고 거기에 씨앗을 뿌리고 매일 물을 준다. 그러자 정말 신기하게도 신문지에서 싹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신문지로 만든 건물을 새싹들이 초록빛으로 완전히 물들인다. 자연이 가진 경이로운 생명력 앞에서 잠시 숙연해지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변형이 아닌 원래의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벨기에 영사관으로 쓰였다는 미술관의 육중한 문을 열고 나오자 매서운 겨울 칼바람이 엄습한다. 옷깃을 여미며 갑자기 미래소년 코난에서 보았던 지구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인간의 욕망으로 완전히 파괴된 세상에도 결국은 자연의 힘에 의해 초록의 새싹이 나고 떠났던 생명이 찾아온다. 자연의 위대한 힘. 그 위대함을 한번 믿어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