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오 평전> 미조구치 유조
<이탁오 평전> 미조구치 유조

<이탁오 평전> 미조구치 유조
#머리말
이탁오李卓吾 (1527~1602)는 본명이 이지로 명나라 왕조 말엽에 살았던 사람이다.
이탁오라는 사람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혹시 누군가는 이 사람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지 모른다.
그는 이단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이단'은 역사의 본류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비협조적인 것을 뜻하지 않는다.
혹은 역사의 본류와는 동떨어진 다른 어떤 곳에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호히려 반대로 '정통을 걸어간 이단'이라는
이 책의 부제에 잘 나타나 있듯이, 역사의 본류를 걸어간 것을 전제로 한 이단이다.
11p-13
제1부 #요시다쇼인ㅊ과 #이탁오
- 하나의 만남
사람에게는 만남이 있고, 그 형태는 여러 가지다.
요시다 쇼인은 책을 통해 이탁오를 만났지만 그래도 하나의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쇼인이 이탁오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분서>를 접한 때는 1859년 정월이었다. 이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조슈번의 노야마 감옥에 투옥되고 잠시 뒤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라고 한 이유는 그해 6월에 에도로 압송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월 덴마 감옥애서 처형될 때까지 결국그는 감옥 바깥으로 나올 수 없었다.
23p-1
2. #참다움과거짓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의 맹렬한 분노는 슬프면서도 다른 한편 아름다움조차 느끼게 한다.
자신의 목표를 전혀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쇼인이 '참다움'에 지나치게 열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참다움'이 너무나 감성적인고 순수했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그가 보인 순진무구한 '동심'의 모습에는
일본인의 원초적인 감정에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행여나 그러한 것이 있다면 말이다.
66p-13
3. #광기와우둔함
4. 지기를 찾아서 1 : 나를 이기는 친구
그래서는 갓난아이와 똑같다. 갓난아이는 서 있을 수도 걸을 수도 없기 때문에,
부모에게 의지해서 손을 붙잡고 비로소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조금 크면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하물며 어른이 된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앞사람의 업적을 추종만 하는 이들은 모두 갓난아이와 같은 부류다.
누군가가 반드시 앞에서 끌어주거나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래서는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하늘이 어떤 한 사람을 낳은 이상, 그에게는 그 사람 고유의 쓸모가 있다.
공자에게 배워서 자신의 부족한 것을 채워넣는 것이 반드시 사람답게 되는 일의 필수 요건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주 옛날, 공자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모두 사람답지 못했다는 것인가?
원래 공자는 다른사람에게 자신을 배우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만약 공자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다면,
어째서 안회가 인(仁)에 대해서 물었을 때, '인을 행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지,
남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을까?
99p-3
5. #지기를찾아서 2 : 나를 알아주는 주군
6. 죽음이라는 글자 1: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제2부 이탁오, 그 사람과 사상
- 76년의 생애 1: 개처럼 산 50년
나는 어려서부터 성스러운 가르침을 읽으면서도 그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공자를 존경하면서도
공부자가 왜 내가 존경해야 하는 인물인지 알지 못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연극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이 '좋지?'라고 물어보면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면서도 사람들 등 뒤에 서서 '예, 그래요'라고 맞장구치는 식이었다.
이렇게 50세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지나지 않았다. 앞에 있는 개가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을 뿐이었다.
191p-1
2. 76년의 생애 2: #박해받은70대
이탁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옳고 그름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규정이 없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역시 정론이 없다. 그렇다고 오늘의 시비 판단은 나 이탁오 한 사람의 시비
판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은.주 삼대에 대해서 나는 논하지 않았다. 그 뒤 삼대, 즉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시대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즉 중간의 1100여 년에 대해서는 시비판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찌 그 시대
사람들에 대한 시비 판단이 없겠는가? 모두 공자의 시비 판단을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 삼았다.
231p-3
3. '무(無)'와 '참다운 공(眞空)'
이탁오는 불교에 출입했지만, 최후까지 사회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의 사회적 본질에 대한 추구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가 '이단의 이단'으로서 차라리 개인의 깨달음 차원에 몰입해 있었다면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무(無)'나 '질실한 공'의 논리를 도입함으로써 '우리 유학'이 가진 정통의 도에 중대한 변혁을 초래했다. 그것을 통해서 감히 '우리 유학의 이단'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거기에 그의 개인적인 비극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80p-7
4. 두 개의 #양명학
무릇 배움은 마음으로 납득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 마음으로 구하여 아니라고 한다면 그런 말이 공자에게
나왔다고 하더라도 감히 그것을 옳다고 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것이 아직 공자에게 미치지 못한 사람의 말이라면
어떻겠는가? 마음으로 구해서 옳다고 한다면, 그런 말이 보통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감히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 말이 공자에게서 나왔다면 어떻겠는가?
294p-13
5. 이탁오 그 후
이지, 즉 이탁오는 중국에서 신해혁명 후 중화민국 시대에 들어가 유교 비판이 지식인 청년층 사이에 널리
퍼져감에 따라 순식간에 명예를 회복했다. 특히 혁명 후의 중국에서는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과 함께
그들에 필적하는 높은 평가를 받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330p-3
#중국사상사 를 통해 오래된 우리의 사상을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다.
#유학의기본경전들 을 읽고 나면 기존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사상가들을 만난다.
왕양명 이나 이탁오가 그렇다. 그들의 삶과 사상을 통해 기존 유학에서 더 확장된 사유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