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시대> J. M. 쿳시
<철의 시대> J.M. 쿳시

<철의 시대> J.M. 쿳시
첫 페이지
V, H. M. C. (1904~1985)
Z. C. (1912~1988)
N. G. C. (1966~1989)를
위하여
1장
물자체(物自體). 충격을 받으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 사이에 놓인 물자체. 내게 뱉은 게 아니고
내 앞에 뱉은 침, 내가 그걸 볼 수 있고, 자세히 관찰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곳에 뱉은 침. 그의 말, 그자신의
입에서 나온, 그의 입을 떠날 당시에는 따뜻했을 그 나름의 말. 언어 이전의 언어에서 나온, 부정할 수 없는 말.
처음에는 바라보더니 다음에는 침을 뱉었다. 어떤 눈길이었느냐고?
한 남자가 자기 어머니뻘의 나이 많은 여자에게 보내는 존경심 없는 눈길. 여기, 당신 커피 가져가.
15p-18
어쩌면 죽음 이후의 삶은 그런 것일지 모른다. 팔걸이 의자와 음악이 있는 로비가 아니라,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크고 혼집한 버스. 서 있을 공간밖에 없어 낯선 사람들한테 밀쳐지며
영원히 서 있어야 하는 버스. 한숨을 쉬는 소리,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로 가득한 후덥지근하고
퀴퀴한 공기. 무차별적인 접촉. 연원히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 사생활의 끝.
43p-9
2장
철로 된 아이들, 나는 생각했다. 플로렌스 자신도 철과 다르지 않다.
철의 시대. 그다음에 오는 청동의 시대. 그러한 순환주기에서, 점토의 시대, 흙의 시대 같은 더 부드러운 시대가
돌아올 때까지 얼마나 오래, 얼마나 오래 걸릴까? 국가를 위해 싸울 아들들을 낳는, 심장이 철로 된 스파르타 부인.
'우리는 이 애들이 자랑스러워요.' 우리. 살아서 방패를 들고 집에 와라, 아니면 죽어서 방패에 실려 집에 와라.
66p-4
"왜냐하면 그건 아이에게 요구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나는 말을 이었다. "아이한테 안아달라고 위로해달라고, 살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위로와 사랑은 앞으로 흐르는 거지 뒤로 흐르는 게 아니니까요. 그게 규칙이에요. 요지부동한 철칙 중 하나죠. 나이든 사람이 사랑을 애걸하면 모든 게 추해지는 법이에요. 어린아이의 침대 속으로 살며시 들어가려는 부모처럼, 부자연 스럽죠.
95p-6
3장
이제 그 아이는 묻혔고, 우리는 그 위로 걸어가요. 나는 이 땅, 이곳 남아프리카에서 걸을 때,
흑인들의 얼굴 위로 지나간다는 느낌을 점점 더 강하게 받아요.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그들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들은 무겁고 완강하게 거기에 누워서 내 발이 통과하기를 기다리고,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다시 들어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무쇠로 된 수백만의 형제들이 지구의 표면 아래에서 떠다니고 있어요.
철의 시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거죠.
161p-9
나는 퍼케일이 가지고 가도록 내 삶을 그에게 준다. 나는 퍼케일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퍼케일을 신뢰한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 그가 약한 갈대이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기댄다.
나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정말이지 그렇지 않단다.
나는 처음부터, 그가 차고 뒤에 종이박스로 잠자리를 만들고 자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가는 길이 점점 더 어두워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너를 향해 가는 나의 길을 느낀다.
한 마디 할 때마다, 나는 그 길을 느낀다.
168p-9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다. 나는 그의 턱수염 하나하나, 이마의 주름살 하나하나를 안다. 네가 아니라 그다. 그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 옆에, 바로 지금. 나를 용서 해라. 남은 시간은 짧고, 나는 내 가슴을 신뢰하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
앞을 볼 수 없고 무지한 나는 진실이 나를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207p-4
4장
지난밤, 끔찍하게 한기가 느껴져 작별인사를 하려고 너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너는 오지 않았다. 나는 네 이름을 나직이 불러봤다. "내 딸아, 내 아가야."
나는 어둠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그러나 내 앞에 나타난 건 사진이었다. 네가 아니라 네 사진이었다.
끊어졌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 선도 끊어졌구나. 이제 나를 붙잡을 건 아무것도 없다.
250p-18
해설 - 타자의 소설, 타자의 소설가
그가 아주 젊었을 때부터 좋아하던 시인 T. S. 엘리엇처럼 그는 예술이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 부터의 탈출"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도 예술은 엘리엇의 말처럼 "감정을 풀어놓은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어야 했다.
255p-5
1985년 어머니를, 1988년 아버지가, 1989년에는 외아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 시기에 소설을 쓴다는 것, 글쓰기의 가치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하는 존경스러운 소설가 J.M. 쿳시
누군가의 소설에 빠져 행복감을 느끼는 책읽기의 즐거움. 올해 읽은 책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