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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대중화의 새로운 전략 : 박재형의 『해동속소학』

문화도시인 2012. 7. 23. 09:22

고전 대중화의 새로운 전략 : 박재형의 『해동속소학』
  고전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고전이 대중에게 더 가까이 있으면 하는 바램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전 대중화의 방법이 무엇인지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고전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친절하게 해설하는 방법도 있지만, 고전을 대중의 현실에 맞추어 새롭게 창조하는 방법도 있다. 조선 말기 박재형(朴在馨)은 전자가 아닌 후자의 방법을 선택하여 『소학(小學)』을 조선의 새로운 고전으로 창조하였다. 그가 선택한 고전 대중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아래에 소개한다.

  김유신(金庾信)이 어렸을 때에 어머니가 날마다 엄한 훈계를 하여 함부로 교유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루는 우연히 여자 노예인 천관(天官)의 집에서 묵고 오자, 어머니가 면전에서 꾸짖어 말하기를 “나는 이제 늙어서 네가 자라 공명을 세우기를 밤낮으로 바라고 있는데 지금 어린아이들과 어울려 창녀가 있는 술집에서 놀다 온 게냐?”라고 하고 하염없이 울었다. 김유신은 즉시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그 집을 지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루는 술에 취해 말이 옛길을 따라 잘못 창녀가 있는 집에 이르렀다. 공(김유신)은 이를 깨닫고 타고 온 말을 베어 안장을 버리고 돌아갔다. (『동경지(東京誌)』에 보인다)
[金庾信爲兒時 母日加嚴訓 不妄交遊 一日偶宿女隸天官家 其母面數之曰 我老 日夜望汝成長立功名 今與小兒遊戱淫房酒肆耶 號泣不已 庾信卽於母前誓不復過門 一日 被酒 馬遵舊路 誤至娼家 公悟 斬所乘馬 棄鞍而返 (見東京誌)]

- 박재형(朴在馨 1838~1900), 「계고(稽古)」『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 권4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이 한번은 옥당(玉堂)에서 숙직하는데 학사(學士) 한 사람이 책을 보다가 마치지 못하고 말했다. “책을 덮으면 곧 잊어버리니 보아서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공이 말했다. “사람이 밥을 먹으면 밥이 항상 뱃속에 남아 있지는 않아서 소화되어 변이 되지만 그 정기(精氣)가 절로 능히 신체를 윤택하게 한다. 독서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보고나서 곧 잊어버려도 절로 크게 진보하는 효험이 있으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국조휘어(國朝彙語)』에 보인다)
[玄谷趙緯韓 嘗直玉堂 有學士看書未竟 曰揜卷輒忘 見之何益 公曰 人之喫飯 不能恒留腹中 消化爲糞 而其精靈之氣 自能潤澤身體 讀書亦類此 見雖輒忘 自有長進之效 不可以不能記自棄之 (見國朝彙語)]

- 박재형(朴在馨), 「가언(嘉言)」『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 권5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에 실린 소학도(小學圖) (국립중앙도서관소장)

  먼 옛날 우리나라에는 순장(殉葬)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夫餘)의 순장은 『삼국지(三國志)』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가야(伽倻)의 순장은 경남 창녕 고분에서 발견된 가야 소녀의 유골에서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순장의 풍습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이 경우 순장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책이었다. 1794년 어느날 정조는 창덕궁 주합루(宙合樓)에 사서삼경(四書三經) 1질(帙)을 특별히 잘 보관하라고 규장각 각신(閣臣)에게 일러 놓았다. 효종의 영릉(寧陵)에는 『심경(心經)』을 순장하였고 영조의 원릉(元陵)에는 『소학』을 순장하였는데 자기도 그 뜻을 계승하겠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다. 만일 정조의 말이 사실이라면 효종은 『심경』의 제왕이고, 영조는 『소학』의 제왕이고, 정조는 사서삼경의 제왕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효종과 정조는 조금 근사해 보이지만 영조는 약간 빈약해 보인다. 아직 『대학』 공부가 안 된 어린 사람이 공부하는 책이 『소학』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소학』의 제왕이라는 발상이 조금 코믹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아니다. 영조의 『소학』은 특별한 『소학』이었다. 영조는  서른에 가까운 나이에 늦게 동궁이 되어 『소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만학도였고, 오래오래 살아 노년기에 자신의 입학을 회고하며 다시『소학』을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린 노학자였다. 『소학』은 장년과 노년의 자기 삶을 가다듬는 빛나는 책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소학』의 제왕이라는 칭호는 영조에게 영예로운 이름이 될 수 있었다.

  더구나, 실제로 『소학』은 어려운 책이었다. 세종대 예조 관리들은 『소학』에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 많고 참조할 해석서가 충분하지 않다며 고충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세종대에 많이 읽혔던 『소학』 해석서는 설장수(偰長壽)가 『소학』을 중국어로 풀이한 『소학직해(小學直解)』였는데, 이 책은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와 함께 통역관을 양성하는 사역원에서 중국어 학습의 기본 교재로 사용되었다. 통역이라, 『소학』을 열심히 공부하면 중국어 전문가가 되는 세상이 세종대였는지? 세종대에 간행된 『소학』의 학술적인 주해서는 하사신(何士信)의 『소학집성(小學集成)』이었는데, 중종대에 완성된 『번역소학(飜譯小學)』은 이 책을 저본으로 삼아 비록 의역 중심의 불완전한 선역이었지만 최초로 『소학』을 한글로 해석하였다. 성종대 이후 조선 사림 사회에서 인기가 있었던 『소학』 주해서는 명나라 사람 정유(程愈)가 지은 『소학집설(小學集說)』이었는데, 사림의 취향이 반영된 듯 선조대에 출간된 『소학언해(小學諺解)』는 이 책을 저본으로 삼아 직역 중심으로 『소학』을 완역하였다. 『소학언해』의 완성에는 이황(李滉)의 문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 때문인 듯 경상도 방언의 영향이 감지된다. 선조대에 출현한 이이(李珥)의 『소학집주(小學集註)』는 기왕의 『소학』 주해서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끝에 나온 조선 『소학』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는데, 조선후기 점차 『소학집주』가 널리 확산됨에 따라 『소학집주』와 『소학언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고, 마침내 영조는 『소학집주』에 훈의와 언해를 가하여 『소학훈의(小學訓義)』를 제작함으로써 조선 『소학』의 종결자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영조는 단순히 『소학』을 공부만 했던 인물이 아니라 조선의 『소학』 전통을 완성한 인물이었고 그렇게 볼 적에 『소학』의 제왕이라는 이름은 더욱 그에게 합당하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든다. 조선 전기 성리학이 정착하던 시기에 김굉필(金宏弼) 같은 학자가 소학동자(小學童子)를 자처한 것은 시대의 전위에 섰다는 비장한 기운마저 전해 주는 면이 있지만, 조선 후기 성리학이 이미 완숙해서 무언가 변화가 요망되는 시기에 영조 같은 제왕이 소학동자를 자처한 것은 완고한 보수를 고집하는 답답한 느낌을 전해 주는 면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소학』은 이념의 책이기에 앞서 실천의 책이었고, 실천이란 불변의 사회에서 나무처럼 서 있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는 동적인 것이었다. 영조가 『소학』을 중시한 것도, 영조대 이후 이익(李瀷)의 학맥에서 안정복(安鼎福)의 『하학지남(下學指南)』이나 황덕길(黃德吉)의 『동현학칙(東賢學則)』이 나와 끊임 없이 하학(下學)의 문제를 탐구했던 것도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하여 이상적인 일상을 창조하고자 하는 실천적인 노력이었다. 그렇게 볼 때, 황덕길의 손제자(孫弟子)에 해당하는 박재형이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을 지은 것은 『소학』의 의미를 연구하고 그 가치를 실천해 왔던 조선의 주자학 전통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생각된다. 『소학』이 중국의 고전이라면 『해동속소학』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언선행(嘉言善行)으로 구성된 조선의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문제의식은 그 이상으로 남다른 데가 있다.

  시험 삼아 『해동속소학』을 펼쳐 보라. 어머니의 훈계를 듣고 창가(娼家)에 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이를 어기게 되자 가차 없이 타고 온 말을 베어 버렸던 김유신의 일화는 어떠한가? 이 이야기는 조선후기 이익의 『해동악부(海東樂府)』, 오광운(吳光運)의 『해동악부』, 이학규(李學逵)의 『영남악부(嶺南樂府)』에 실렸던 유명한 일화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사(詠史)의 세계에 머물렀을 뿐 일찍이 소학적 지식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박재형은 이를 해냈다! 또, 홍문관의 동료가 책을 읽어도 항상 잊어버린다고 자책하자 책 읽기를 멋들어지게 밥 먹기에 비유한 조위한의 일화는 어떠한가? 이 이야기 역시 조선후기 야담집에 실려 있던 유명한 일화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담의 세계에 머물렀을 뿐 일찍이 소학적 지식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박재형은 이를 해냈다! 변화하는 사회의 새로운 도덕을 창조하는 과업에 조선의 역사도 『소학』이 될 수 있고 조선의 야담도 『소학』이 될 수 있다는 『소학』 대중화의 전략. 이러한 전략 위에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역사 이야기가 『소학』의 창을 열고 들어와 더욱 활성화될 수 있었으며,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야담이 수신 교과서의 문을 열고 들어와 새롭게 국민 도덕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전자의 경우 3ㆍ1운동 직후 김로수(金魯洙)가 지은 『소학속편(小學續編)』이, 후자의 경우 애국계몽기(愛國啓蒙期)에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편찬한 『고등소학수신서(高等小學修身書)』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박재형의 마인드로 우리 시대의 『소학』을 다시 만들 수 있을까? <지금은 라디오 시대>, <인간 극장>, <아고라> 등등 일상적인 미디어에서 만나는 온갖 한국 사람의 애환이 담긴 우리 시대의 야담으로 『소학』을 다시 만들 수 있을까? 『해동속소학』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조선의 고전으로 평가받아 출판되었듯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 시대의 『소학』 역시 훗날 훌륭한 고전이 되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