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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오, 유구(琉球)! 정말 미안하오.

문화도시인 2012. 6. 11. 11:08

미안하오, 유구(琉球)! 정말 미안하오.
  옛날 이 땅에는 삼국이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 옛날을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성급하다. 가야도 엄연히 옛날 이 땅에 있던 나라가 아니던가. 지금 동아시아에는 삼국이 있다. 한국, 중국, 일본. 하지만, 그렇다고 그 옛날까지 동아시아 삼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곤란하다. 유구도 엄연히 동아시아에 있던 나라가 아니던가. 지금은 일본에 강제 병합되어 오키나와 현으로 편입된 상태에 있지만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나라 유구. 그런데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이 유구에 대해 조선이 잘못한 일이 있다고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마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베트남에 대해 한국이 잘못한 일이 있다고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듯이. 그것은 무슨 일이었을까?

  인조 때에 왜인(倭人)이 유구를 침략해서 그 왕을 잡아 갔다. 왕세자가 보물을 갖고 왜(倭)에 들어가 부왕(父王)을 풀어 달라고 하려 하는데 배가 표류하다 제주 바닷가 구석에 정박하였다. 제주 목사 이란(李灤)이 사람을 보내 배 안을 정탐하게 하니 산을 덮을 만한 휘장 2부(浮), 술이 샘솟는 돌 1좌(座), 흰 앵무새 1쌍, 수정 알 2매(枚) 등의 보물이 있었다. 휘장은 거미줄로 짜서 약을 칠해 만들었다. 돌은 넓이 한 자, 길이 한 자 두 치, 높이 네 자 남짓으로 맑은 물을 담으면 술이 되었다. 앵무새는 왼발의 발톱으로 비파를 켤 수 있었다. 알은 거위 알과 비슷한데 밤에 방 안에 두면 햇살처럼 밝은 빛이 났다. 그 나머지는 매우 신비하고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이란은 그것들을 갖고 싶어서 사자(使者)를 보내 통보하기를 “나에게 술이 샘솟는 돌을 달라. 너희들을 왜에 들어가도록 보내 주겠다.”라고 하였다. 세자는 “내가 보물을 아끼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부왕께서 힘없이 붙잡혀 갇혀 계셔서 보물이 없으면 부왕을 풀어 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치욕은 이웃 나라의 치욕과 같으니, 원컨대 대부(大夫)는 이를 슬퍼하소서.”라고 하였다. 사자가 세 번 갔으나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또 귀국을 간청하고 중요한 보물을 바다에 띄워 보내 주니 이란이 수군을 출동시켜 이를 포위하였다. 세자가 붙잡히자 종자 하나가 돌을 안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란은 배 안의 물건을 모두 약탈하고 마침내 세자를 죽였다. 따라 죽은 사람이 열 사람 남짓 되었다. 세자는 죽음에 임해 혈서로 시를 지었다.

  요(堯)의 말 믿기 어렵다 하고 걸(桀)의 옷차림이라
  죽음에 임하여 하늘에 호소할 겨를도 없네
  세 어진이 순장(殉葬)을 대속(代贖)할 이 누구인가
  두 아들 배를 탈 때 도적이 불인(不仁)했도다
  모래벌판 해골에 잡초가 얽히리니
  이내 혼 고국(古國) 간들 슬퍼할 친지 있을까
  제주도 앞 바닷물은 도도하게 흐르고
  남은 원한 선명하여 만 년간 오열하리

앵무새도 세자 곁에서 죽었다. 이란이 세자를 죽이고 국경을 침범한 도적이라고 속여 조정에 아뢰었다가 뒤에 일이 탄로 나자 이란은 연좌되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
  논한다. “슬프고 슬프구나. 유구 세자의 일이 슬프고 슬프구나. 세상에는 ‘세자가 작은 보물을 아껴 위로 임금을 맞이하지 못했고 아래로 자신을 보전하지 못했으니 족히 일컬을 데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또한 지나친 말이다. 이란의 형세를 보건대 보물을 주었어도 죽었고 보물을 주지 않았어도 죽었다. 똑같이 죽는 것인데 하필 보물을 주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세자처럼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명철한 사람이 어찌 차마 보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물며 자신이 살면 임금을 맞이할 수 있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음에랴! 그러나 세자는 반드시 여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무릇 이란의 죄는 세 가지이다. 재물을 탐내 사람을 죽인 것이 첫 번째이다. 이웃 나라와의 외교를 망가뜨린 것이 두 번째이다. 임금을 속인 것이 세 번째이다. 신하가 이 가운데 한 가지 죄라도 있으면 마땅히 형을 받아 죽어야 하거늘 당시 군자가 그 죄를 성토하는 말을 한 마디도 내지 않아 포악한 난신(亂臣)이 편안히 복을 누리고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유구 사람이 군사를 일으켜 바다 건너 서쪽을 향해 두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어떤 말로 대답할 것인가? 이란의 인육을 먹는 것으로 충분한 일인가? 단지 다행히 유구가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며 또 바야흐로 왜놈의 난리 때문에 여기에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다. 이로부터 유구의 통신사가 끊어졌으니, 아, 이웃 나라에 들려 줄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임금 을묘년(1795, 정조19) 겨울 유구 사람이 제주에 왔다. 임금께서 특명으로 서울에 부르는데 연로(沿路)에서는 말을 주고 경기 감영에서는 음식을 주었다. 동지사(冬至使) 상국(相國) 김희(金熹)가 사행을 가서 청(淸)의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으로 갖추어 말하고 육로로 보내 자기 나라에 가도록 하였다. 아, 성인의 덕이 지극하고 크도다. 무릇 표류해 온 사람이 세 사람이었는데 배가 모두 파손되고 소지한 물건이 없었다. 그 중 공인(公人)은 성이 미정(米政)이고 두 사람은 사공 같았다. 그 나라 임금의 성씨를 물으니 성은 정(正)이라 하였는데 유구 세자 때에 이미 왕조가 바뀌었다 한다.”

[仁祖時。倭人侵琉球。執其王以歸。王世子齎珍寶入倭。將贖父王。舟漂來泊于濟州洋曲中。濟州牧李灤。送人偵舟中。寶有漫山帳二浮。酒泉石一座。白鸚鵡一雙。水晶卵二枚。帳以蜘蛛絲。塗㓒藥造成。石廣一尺。長一尺有二寸。高四尺餘。貯淸水則爲酒。鸚鵡能以左指彈琵琶。卵似鵝卵。夜置室中。光明如日。其餘甚秘。不得識也。灤意欲之。遣使報曰。與我酒泉石。當送爾入倭也。世子辭曰。吾非愛寶也。今父王頹然在拘幽中。無寶無以贖父王。吾國之耻。猶隣國之恥也。願大夫哀之。使三往。世子涕泣不許。且乞歸國。以重寶浮海來餽。灤發舟師圍之。世子被禽。有一從者抱石投水死。灤因盡掠舟中諸物。遂殺世子。從死者十餘人。世子臨死。咋血書詩曰 堯語難孚桀服身。臨刑何暇訴蒼旻。三良入穴人誰贖。二子乘舟賊不仁。骨暴沙塲纏有草。魂歸古國吊無親。竹西樓下滔滔水。遺恨分明咽萬春。鸚鵡亦死于世子之傍。灤旣殺世子。誣以犯境賊啓于朝。後事露。灤坐幾死。
論曰。哀哉悲夫。琉球世子之事。悲夫哀哉。世之談者以爲世子愛尺寸之寶。上不能迎其君。下不能全其身。無足稱者。亦過矣。觀灤之勢。與寶亦死。不與寶亦死。等死。何必以寶與之也。不然。以世子之孝之仁之明。豈忍重其寶而不重其身者也。而况乎身生則君可以迎。國可以保焉者乎。而世子必不出於此也。夫灤之罪有三焉。貪財殺人一也。壞隣國交二也。欺君誣上三也。人臣有一於此。宜伏祥刑。而當時君子不能出一言以討其罪。使暴亂之臣。坐享爵祿。子孫榮貴。寧不悲乎。使琉球之人。興兵出師。浮海西指。以報二君之讐。則我將何辭以對。而灤之肉。又足食乎。只幸琉球國小力弱。又方有倭奴之亂而不暇於此爾。自是琉球之信使遂絶。嗚乎。不足聞於隣國也。今上乙卯冬。琉球人來到濟州。上特命召至京師。沿路給馬。自畿營餽廩。冬至使相國金公熹之行。具咨禮部。以陸路送至其國。嗚乎。聖人之德。其至矣大哉。凡漂來者。只有三人。而舟楫盡碎。無所持物。其中一公人姓米政。二人似蒿工。問其國王姓。姓正。盖去琉球世子時。已革世云。]

                   ▶ 유구왕세자외전이 실려 있는 담정유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김려(金鑢 1766~1821),「丹良稗史(단량패사) 유구왕세자외전(琉球王世子外傳)」,『담정유고(藫庭遺藁)』

  서기 1609년, 동아시아에는 바닷길이 세 개 열렸다. 하나는 조선과 일본의 바닷길. 이 해 조선은 일본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고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통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하였다.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와 일본의 바닷길. 일곱 해 전 동인도 종합상사(VOC)를 설립한 네덜란드는 이 해 일본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히라도에 무역관을 설치하였다. 이 무역관의 초대 관장 자크 스펙스가 거느린 조선인 수종이 사실은 루벤스의 초상화 <한복 입은 남자>의 진짜 모델이라는 학설도 있다. 끝으로 나머지 하나는 유구와 일본의 바닷길. 이 해 일본 살마(薩摩 사쯔마)의 도진가구(島津家久 시마즈 이에히사)는 유구를 침략해 서울인 수리(首里)를 함락하고 중산왕(中山王) 상령(尙寧)을 포로로 붙잡아 덕천가강(德川家康)에게 데리고 갔다. 유구를 복속시킨 일본은 유구를 이용해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을 획책하였다. 이 세 바닷길은 전쟁과 평화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목적은 단 하나, 교역의 욕망이었다.

  제주도 해역이 소란스러워진 것이 이 무렵이었다. 네덜란드 우베르케르크 호의 선원 웰트후레이(박연)가 1627년 제주도에 표착(漂着)하였고 드 스페르버르 호의 선원 하멜이 1653년 역시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하멜은 운이 좋아 13년 만에 극적으로 일본으로 탈출했지만 대개는 한번 조선에 표류되었다 하면 평생 동안 조선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서양인을 처음 만난 조선 사람들의 두려움도 컸겠지만 그 이상으로 제주도는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공포스런 블랙 홀이었다. 하지만 제주도 해역의 악명 -예측할 수 없는 풍랑이 곧잘 일어나고 한번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했다 하면 평생을 나오지 못한다는 악명- 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1613년 유구 상선이 제주도에서 만난 재난은 그 이상으로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것은 곧 제주 목사와 제주 판관이 제주도에 표류한 유구 상선을 습격하여 선원을 모두 몰살하고 재화를 모두 강탈한 사건이었다. 적어도 웰트후레이와 하멜은 제주도에 표류된 후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다. 표류민을 인도적으로 구호하고 송환하지는 못할 망정 이 어찌 동방예의지국을 자처하는 조선에 합당한 처사란 말인가.

  물론 제주 목사도 할 말은 있었다. 1613년 현재 동아시아는 임진왜란 이후 여전히 일종의 냉전 상태에 빠져 있었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의 허황된 야망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났고 일본은 임진왜란이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어떤 재앙을 남겼는지, 그리고 차후 어떻게 이웃나라에게 평화를 약속할지에 대해 충분한 믿음을 보여주지 못했다. 조선과는 통상 재개에 합의를 보았으나 아직 임진왜란 이전의 교린을 회복하지는 못했고, 명나라와는 외교통상이 단절된 가운데 유구의 조공 무역에 일본 상인을 끼워 넣어 배후에서 명과 통상하려고 꼼수를 부리다가 유구의 조공 무역이 2년 1공(貢)에서 10년 1공으로 격하되는 철퇴를 맞기도 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제주도에 표류한 유구 상선에 상당수의 일본인 선원이 탑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뜩이나 전란의 기억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더구나 유구를 위장한 일본의 조공 무역 시도가 명나라에 발각되어 저지된 상태에서 조선에 매우 위험한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주 목사의 해적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유구는 조선이 중국 북경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교린 국가였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明)의 만력제(萬曆帝)가 유구와 섬라(暹羅, 타이)의 수군 20만을 동원하여 일본 본토를 공격할 것이라는 작전 계획이 선조에게 알려질 정도로 든든해 보이는 우방 국가였다. 조선시대 야담집 『동야휘집』에 수록된 바 유구국 공주와 결혼한 신희복(愼希復) 이야기에서 보듯 유구는 조선의 민간사회에서 신비롭고 풍요로운 낙토의 이미지로 상상되고 있었다. 따라서 유구 상선이 조선의 제주에서 제주 목사에게 재난을 당한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 사건은 조선후기 상당히 충격적인 일로 기억되었고,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 같은 연대기는 물론 이중환의 『택리지』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박지원의 『열하일기』, 기타 야담집에서 곧잘 언급되었다.

  김려가 전하는 위 글 「유구 왕세자 외전」도 그러한 이야기의 하나인데 이 글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사료인지는 엄밀한 검증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유구 상선에 탑승했던 유구 귀인이 『광해군일기』에서 말하듯 단순한 사신(使臣)인지 아니면 『인조실록』에서 말하듯 유구의 왕자인지는 논란거리라도 되겠지만, 김려가 문제의 제주목사를 이란이라고 한 것은 실제 인물 이기빈(李箕賓)을 잘못 기록한 명백한 오류이고 사건의 시기를 인조대라고 한 것도 광해군대의 일인데 잘못 전한 것이다. 그 밖에 산을 덮을 만한 휘장, 술이 샘솟는 돌 등도 모두 문학적 윤색으로 보이는데 실제 정황은 『광해군일기』에서 말하는 황견사(黃繭絲)와 명주(明珠)와 마노(瑪瑙)였을 것이다.

  사실 김려의 글에서 주목할 부분은 후반부인 논(論)이라고 생각된다. ‘미안하오, 유구! 정말 미안하오.’ 그는 거의 이런 마음으로 이 일을 슬퍼했다. 그렇기에 그는 정조대에 제주도에 표류한 유구 사람을 중국으로 안전하게 보내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했다. 마치 과거사를 진심으로 사과하는 뜻에서 취해진 조처인 것처럼 보았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미안함’이다. 그리고 미안함의 역사적 구조이다. 당시 유구와 네덜란드만 재앙을 만난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조선 제주도에 명나라 사람들이 표류하면 조선은 해외 반청운동을 의심하는 청의 강압 때문에 돌아가면 그들이 죽을 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청에 보내야 했다. 효종 때도 그랬고 현종 때도 그랬다. 살기 위해서 미안한 일을 일삼았다. 하지만 춘추대의(春秋大義)가 있었기에, 의식을 배반한 존재의 부끄러움을 결코 잊지는 않았다. 역사에 희생된 부끄러운 주체의 윤리적인 재건, 그것이 곧 조선 후기 존화(尊華)의 역사적 함의였다. 조선에서 17세기와 18세기의 차이, 그것은 부끄러운 현재를 미안해할 겨를조차 없었던 생존의 시대와 부끄러운 과거를 미안해하고 윤리적으로 치유해 나가는 문화의 시대, 그런 차이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래서 유구 왕세자 사건을 한갓 전설로 치부해 버리는 박지원의 냉소적인 눈길보다 이를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선린을 추구하는 김려의 따뜻한 마음을 소중히 여긴다. 지금 동아시아에 필요한 것은 이러한 ‘미안함’의 지성사적 전통들을 서로 공유하고 그 위에서 진정한 선린에 이르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미안함’의 역사학, 근사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