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609년, 동아시아에는 바닷길이 세 개 열렸다. 하나는 조선과 일본의 바닷길. 이 해 조선은 일본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고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통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하였다.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와 일본의 바닷길. 일곱 해 전 동인도 종합상사(VOC)를 설립한 네덜란드는 이 해 일본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히라도에 무역관을 설치하였다. 이 무역관의 초대 관장 자크 스펙스가 거느린 조선인 수종이 사실은 루벤스의 초상화 <한복 입은 남자>의 진짜 모델이라는 학설도 있다. 끝으로 나머지 하나는 유구와 일본의 바닷길. 이 해 일본 살마(薩摩 사쯔마)의 도진가구(島津家久 시마즈 이에히사)는 유구를 침략해 서울인 수리(首里)를 함락하고 중산왕(中山王) 상령(尙寧)을 포로로 붙잡아 덕천가강(德川家康)에게 데리고 갔다. 유구를 복속시킨 일본은 유구를 이용해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을 획책하였다. 이 세 바닷길은 전쟁과 평화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목적은 단 하나, 교역의 욕망이었다.
제주도 해역이 소란스러워진 것이 이 무렵이었다. 네덜란드 우베르케르크 호의 선원 웰트후레이(박연)가 1627년 제주도에 표착(漂着)하였고 드 스페르버르 호의 선원 하멜이 1653년 역시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하멜은 운이 좋아 13년 만에 극적으로 일본으로 탈출했지만 대개는 한번 조선에 표류되었다 하면 평생 동안 조선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서양인을 처음 만난 조선 사람들의 두려움도 컸겠지만 그 이상으로 제주도는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공포스런 블랙 홀이었다. 하지만 제주도 해역의 악명 -예측할 수 없는 풍랑이 곧잘 일어나고 한번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했다 하면 평생을 나오지 못한다는 악명- 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1613년 유구 상선이 제주도에서 만난 재난은 그 이상으로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것은 곧 제주 목사와 제주 판관이 제주도에 표류한 유구 상선을 습격하여 선원을 모두 몰살하고 재화를 모두 강탈한 사건이었다. 적어도 웰트후레이와 하멜은 제주도에 표류된 후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다. 표류민을 인도적으로 구호하고 송환하지는 못할 망정 이 어찌 동방예의지국을 자처하는 조선에 합당한 처사란 말인가.
물론 제주 목사도 할 말은 있었다. 1613년 현재 동아시아는 임진왜란 이후 여전히 일종의 냉전 상태에 빠져 있었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의 허황된 야망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났고 일본은 임진왜란이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어떤 재앙을 남겼는지, 그리고 차후 어떻게 이웃나라에게 평화를 약속할지에 대해 충분한 믿음을 보여주지 못했다. 조선과는 통상 재개에 합의를 보았으나 아직 임진왜란 이전의 교린을 회복하지는 못했고, 명나라와는 외교통상이 단절된 가운데 유구의 조공 무역에 일본 상인을 끼워 넣어 배후에서 명과 통상하려고 꼼수를 부리다가 유구의 조공 무역이 2년 1공(貢)에서 10년 1공으로 격하되는 철퇴를 맞기도 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제주도에 표류한 유구 상선에 상당수의 일본인 선원이 탑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뜩이나 전란의 기억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더구나 유구를 위장한 일본의 조공 무역 시도가 명나라에 발각되어 저지된 상태에서 조선에 매우 위험한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주 목사의 해적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유구는 조선이 중국 북경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교린 국가였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明)의 만력제(萬曆帝)가 유구와 섬라(暹羅, 타이)의 수군 20만을 동원하여 일본 본토를 공격할 것이라는 작전 계획이 선조에게 알려질 정도로 든든해 보이는 우방 국가였다. 조선시대 야담집 『동야휘집』에 수록된 바 유구국 공주와 결혼한 신희복(愼希復) 이야기에서 보듯 유구는 조선의 민간사회에서 신비롭고 풍요로운 낙토의 이미지로 상상되고 있었다. 따라서 유구 상선이 조선의 제주에서 제주 목사에게 재난을 당한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 사건은 조선후기 상당히 충격적인 일로 기억되었고,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 같은 연대기는 물론 이중환의 『택리지』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박지원의 『열하일기』, 기타 야담집에서 곧잘 언급되었다.
김려가 전하는 위 글 「유구 왕세자 외전」도 그러한 이야기의 하나인데 이 글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사료인지는 엄밀한 검증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유구 상선에 탑승했던 유구 귀인이 『광해군일기』에서 말하듯 단순한 사신(使臣)인지 아니면 『인조실록』에서 말하듯 유구의 왕자인지는 논란거리라도 되겠지만, 김려가 문제의 제주목사를 이란이라고 한 것은 실제 인물 이기빈(李箕賓)을 잘못 기록한 명백한 오류이고 사건의 시기를 인조대라고 한 것도 광해군대의 일인데 잘못 전한 것이다. 그 밖에 산을 덮을 만한 휘장, 술이 샘솟는 돌 등도 모두 문학적 윤색으로 보이는데 실제 정황은 『광해군일기』에서 말하는 황견사(黃繭絲)와 명주(明珠)와 마노(瑪瑙)였을 것이다.
사실 김려의 글에서 주목할 부분은 후반부인 논(論)이라고 생각된다. ‘미안하오, 유구! 정말 미안하오.’ 그는 거의 이런 마음으로 이 일을 슬퍼했다. 그렇기에 그는 정조대에 제주도에 표류한 유구 사람을 중국으로 안전하게 보내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했다. 마치 과거사를 진심으로 사과하는 뜻에서 취해진 조처인 것처럼 보았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미안함’이다. 그리고 미안함의 역사적 구조이다. 당시 유구와 네덜란드만 재앙을 만난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조선 제주도에 명나라 사람들이 표류하면 조선은 해외 반청운동을 의심하는 청의 강압 때문에 돌아가면 그들이 죽을 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청에 보내야 했다. 효종 때도 그랬고 현종 때도 그랬다. 살기 위해서 미안한 일을 일삼았다. 하지만 춘추대의(春秋大義)가 있었기에, 의식을 배반한 존재의 부끄러움을 결코 잊지는 않았다. 역사에 희생된 부끄러운 주체의 윤리적인 재건, 그것이 곧 조선 후기 존화(尊華)의 역사적 함의였다. 조선에서 17세기와 18세기의 차이, 그것은 부끄러운 현재를 미안해할 겨를조차 없었던 생존의 시대와 부끄러운 과거를 미안해하고 윤리적으로 치유해 나가는 문화의 시대, 그런 차이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래서 유구 왕세자 사건을 한갓 전설로 치부해 버리는 박지원의 냉소적인 눈길보다 이를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선린을 추구하는 김려의 따뜻한 마음을 소중히 여긴다. 지금 동아시아에 필요한 것은 이러한 ‘미안함’의 지성사적 전통들을 서로 공유하고 그 위에서 진정한 선린에 이르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미안함’의 역사학, 근사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