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1일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은 공약 준비로 부산하다. 총선 공약 중에서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세금 문제이다. 최근에는 소득세의 과세 기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어느 시대이건 세금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였고, 580여년 전 세종 시대에도 과세 기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조선시대는 토지에 세금을 부여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큰 재원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이라 하여, 풍흉을 직접 조사하여 세금을 매기는 방식을 취했으나, 토지를 조사하는 위관(委官)들의 성향에 따라 세금이 좌우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이에 세종은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마련하였다. 공법이란 국가가 수취하는 토지세의 한 제도로서, 수년간의 수확고를 통산하여 평년의 수익을 정해진 비율로 삼아 세금을 매기는 제도였다. 1427년(세종 9) 세종은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서 문과(文科) 책문(策問)의 제(題)를 공법(貢法)으로 했다. 공법 시행에 앞서 재능 있는 선비들의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였다.
인정전에 나아가 문과 책문의 제(題)를 내었다. 왕은 이렇듯 말하노라.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정치를 함에는 반드시 일대(一代)의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니, 방책(方冊)에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전제(田制)의 법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가. 하후씨(夏后氏)는 공법으로 하고, 은인(殷人)은 조법(助法)으로 하고, 주인(周人)은 철법(徹法)으로 한 것이 겨우 전기(傳記)에 나타나 있는데, 삼대의 법을 오늘날에도 시행할 수 있겠는가. …… 명나라에서 문득 옛 제도를 따라 하후씨(夏后氏)의 공법을 채택하였다 해서, 어찌 그것이 행하기가 편리하고 쉽다고만 할 것인가.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는 집으로써 나라를 만들고 먼저 토지 제도를 바로잡으셨고, 태종 공정대왕께서도 선왕의 뜻을 따라 소민(小民)을 보호하셨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으로 큰 기업(基業)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우러러 조종(祖宗)의 훈계를 생각하여 융평(隆平)의 다스림에 이르기를 기대했으나, 그 방법을 얻지 못하였다. 돌아보건대 어떻게 닦아야만 이룰 수 있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다스림을 이루는 요체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하니, 백성을 사랑하는 시초란 오직 백성에게 취하는 제도가 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전제(田制)와 공부(貢賦)만큼 중한 것이 없는데, 토지 제도는 해마다 조신(朝臣)을 뽑아서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손실을 실지로 조사하여 적중(適中)을 얻기를 기하였다. 간혹 사자로 간 사람이 나의 뜻에 부합되지 않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救恤)하지 아니하여, 나는 매우 이를 못 마땅하게 여겼다. …… 조법(助法)은 반드시 정전(井田)을 행한 후에야 시행되므로, 역대의 중국에서도 오히려 또한 시행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준하고 고원(高原)과 습지가 꼬불꼬불하여 시행되지 못할 것이 명백하였다. 공법은 하나라의 책에 기재되어 있고, 비록 주나라에서도 또한 조법이 있어서 향(鄕)과 수(遂)에는 공법을 사용하였다고 하나, 다만 그것이 여러 해의 중간을 비교하여 일정한 것을 삼음으로써 좋지 못하였다고 이르는데, 공법을 사용하면서 이른바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 맹자는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田制)로부터 시작된다.’라고 하였으며, 유자(有子)는 말하기를, ‘백성이 유족(裕足)하면, 임금이 어찌 부족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비록 덕이 적은 사람이나 이에 간절히 뜻이 있다. 그대들은 경술에 통달하고 정치의 대체를 알아 평일에 이를 강론하여 익혔을 것이니, 모두 진술하여 숨김이 없게 하라. 내가 장차 채택하여 시행하겠노라.”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9년 3월 16일) [御仁政殿, 出文科策問題。王若曰: “自古帝王之爲治, 必立一代之制度, 稽諸方策, 可見矣。 制田之法, 昉於何時? 夏后氏以貢、殷人以助、周人以徹, 僅見於傳記。 三代之法, 可行於今日歟? …… 皇明動遵古制, 而取夏后之貢, 豈其行之便易歟?” 惟我太祖康獻大王, 化家爲國, 首正田制, 太宗恭定大王, 遹追先志, 懷保小民。 肆予寡昧, 嗣承丕基, 仰惟祖宗之訓, 期至隆平之治, 未得其道, 顧何修而致歟? 嘗聞致治之要, 莫先於愛民, 愛民之始, 惟取民有制耳。 今之取於民, 莫田制貢賦之爲重。 若田制則歲揀朝臣, 分遣諸道, 踏驗損實, 期於得中, 間有奉使者, 不稱予意, 不恤民隱, 予甚非之。…… 助法, 必井田而後行。 歷代中國, 尙且不能, 況我國山川峻險, 原隰回互, 其不可也明矣。 貢法載於《夏書》, 雖周亦助, 而鄕遂用貢, 但以其較數歲之中, 以爲常, 謂之不善, 用貢法而去。 所謂不善, 其道何由? …… 孟子曰: “仁政必自經界始。” 有子曰: “百姓足, 君孰與不足!” 予雖涼德, 竊有志於斯焉。 子大夫通經術、識治體, 講之於平日熟矣, 其悉陳無隱, 予將採擇而施用焉]

▶ 세종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세종은 공법 결정 이전에 과거 시험에 공법 관련 내용을 출제함으로써, 공법 제정 문제가 조정의 현안임을 강조하는 한편, 공법 시행 이전에 분위기를 미리 조성하고자 하였다. 공법 결정 이전에 세종은 신하와 유생들의 의견을 알아본 후에, 최종적으로 공법의 시행은 백성이 결정할 사안으로 판단하였다. 1430년(세종 12) 세종은 ‘공법’이라는 새로운 세법 시안을 갖고 백성들에게 그 찬반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무려 5개월간 실시하였다. 치밀한 성품과 백성들을 최우선으로 하는 세종의 의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 『세종실록』에는 “정부ㆍ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ㆍ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세종실록』, 세종 12년 3월 5일)”는 기록이 보인다. 이어서
정사를 보았다. 호조 판서 안순(安純)이 아뢰기를, “일찍이 공법의 편의 여부를 가지고 경상도의 수령과 백성들에게 물어본즉, 좋다는 자가 많고, 좋지 않다는 자가 적었사오며, 함길·평안·황해·강원 등 각도에서는 모두들 불가하다고 한 바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직접 찾아 조사할 때에 각기 제 주장을 고집하여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편리하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가 심히 우려하고 있다. 각도의 보고가 모두 도착해 오거든 그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사해서 폐해를 구제하는 등의 일들을 관리들로 하여금 깊이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2년(1430년) 7월 5일) [視事。 戶曹判書安純啓: “曾以貢法便否, 訪于慶尙道守令人民, 可多否少, 咸吉、平安、黃海、江原等道, 皆曰: ‘不可。’” 上曰: “民若不可, 則未可行之。 然損實踏驗之際, 各執所見, 頗多失中。 且姦吏用謀, 富者便之, 貧者苦之, 予甚慮焉。 各道所報皆到, 則貢法便否及踏驗救弊等事, 令百官熟議以啓。”]
위의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세종이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民若不可)’고 천명한 점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백성이 찬성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다는 세종의 선언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1430년 8월 10일 호조에서는 공법 실시를 둘러싼 국민투표의 결과를 보고하였다. 17만 여명의 백성들이 투표에 참여하여, 9만 8,657명이 찬성, 7만 4,148명이 반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찬반 상황을 지역별로 『세종실록』에 기록할 정도로 국가의 역량이 집중된 사업이었다. 당시 인구수를 고려하면 17만 여명의 참여는 노비나 여성을 제외한 거의 전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요즈음처럼 인터넷이나 전화로 여론조사가 불가했던 그 시절에 수많은 백성들을 대상으로 일일이 투표에 참석하도록 한 점은 매우 눈길을 끈다. 관리들이 집집마다 백성을 찾아가며 의견을 물었을 가능성이 큰데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이는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큰 사업이었다. ‘민본’과 ‘민주적 절차’, ‘백성과의 소통’을 중시했던 세종의 의지는 580년 전의 국민투표를 가능하게 하였고, 그 성과물인 공법은 세종 시대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