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론에 “이미 발하면 리(理)가 기(氣)를 타고 운행하니……사단(四端)도 기(氣)이다.” 한 데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사단도 기(氣)라고 그 동안 누차 말하셨는데 여기서 또 인용하신 주자(朱子)가 제자의 물음에 답한 말이 매우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공은 맹자(孟子)가 말한 사단도 기(氣)가 발한 것으로 봅니까? 만약 기가 발한 것으로 본다면, 이른바 ‘인(仁)의 단서’ㆍ‘의(義)의 단서’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 네 글자는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기(氣)가 섞인 것으로 본다면 순수한 천리(天理)의 본연(本然)이 아닐 것이며, 순수한 천리로 본다면 그 발하는 단서는 틀림없이 진흙이 물에 섞인 상태처럼 기(氣)가 섞여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공은 인ㆍ의ㆍ예ㆍ지는 미발(未發)한 때의 명칭이므로 순수한 리(理)이고, 사단은 이발(已發)한 뒤의 명칭이라 기(氣)가 아니면 행해질 수 없으므로 사단 역시 기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생각건대, 사단도 비록 리(理)가 기를 타는 것이지만 맹자가 가리킨 바는 기를 타는 데 있지 않고 오직 순수한 리가 발하는 데에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의 단서’ㆍ‘의의 단서’라 하였고, 후대의 학자들도 맹자가 말한 사단에 대해 “정(情) 중에서 선(善)한 측면만 끄집어내어 말한 것이다.” 했던 것입니다. 만약 기를 개념 속에 넣어서 말하였다면 사단도 이미 진흙이 물에 섞이듯이 혼탁한 것이 될 터이니, 이러한 말들을 모두 붙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것으로 리(理)가 기(氣)를 타고 운행함을 비유한 고인(古人)의 설명이 참으로 좋습니다. 대개 사람은 말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하고 말은 사람이 아니면 길을 잃게 되니, 사람과 말이 서로 없어서는 안 되고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을 가리켜 말하는 사람이 혹 범범하게 전체를 가리켜서 간다고 말하면 사람과 말이 모두 그 가운데 있으니 사단과 칠정을 하나로 합쳐서 말하는 경우가 이것이고, 혹 사람이 가는 것만을 가리켜 말하면 굳이 말을 아울러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 가는 것은 그 가운데 있으니 사단이 이것이고, 혹 말이 가는 것만을 가리켜 말하면 굳이 사람을 아울러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가는 것은 그 가운데 있으니 칠정이 이것입니다. 지금 공은 내가 사단ㆍ칠정을 둘로 나누어 말하는 것을 보면 언제나 하나로 합쳐서 말한 것을 인용하여 공박하니, 이는 남이 “사람이 가고 말이 간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사람과 말은 하나이니 나누어 말해서는 안 된다고 힘써 주장하는 격입니다. 또 내가 칠정을 기가 발한 것으로 말하면 리(理)가 발한 것이라고 힘써 주장하니 이는 남이 “말이 간다.”고 하는 말을 듣고 굳이 “사람이 간다.”고 하는 격이며, 내가 사단을 리가 발한 것이라고 말하면 또 기가 발한 것이라고 힘써 주장하니 이는 남이 “사람이 간다.”고 하는 말을 듣고 굳이 “말이 간다.”고 하는 격입니다. 이는 바로 주자(朱子)가 말한 ‘숨바꼭질[迷藏之戲]’과 같은 것1)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1) 주자(朱子)가…것 : 주자가 여자약(呂子約)에게 답한 편지에서 “대저 학문은 단지 두 갈래 길 뿐이니, 치지(致知)와 역행(力行)일 뿐입니다. 사람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먼저 공부의 차례에 따라 십분 힘을 쓰면 차츰 효과를 보게 되고, 그런 뒤에 또 어느 곳이 부족한지 알았으면 곧 이곳에 힘써 공부하는 것이 바로 바른 이치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이렇게 하려 하지 않고 남이 자기의 견해가 옳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도리어 수긍하지 않고 대뜸 ‘우선 내가 본원(本原)을 함양하고 힘써 실천할 때를 기다려라.’ 하니, 이는 마치 아이들의 숨바꼭질과 같습니다. 술래가 동쪽으로 오면 나는 서쪽으로 가서 숨고 술래가 서쪽으로 오면 나는 또 동쪽으로 가서 피하는 격입니다. 이와 같이 나왔다 숨었다 해서야 어느 때 끝나겠습니까?[大抵學問只有兩途, 致知力行而已. 在人須是先依次第, 十分著力, 節次見效了, 向後又看甚處欠闕, 即便於此更加功夫, 乃是正理. 今却不肯如此, 見人説著自家見處未是, 却不肯服, 便云且待我涵養本原, 勉强實履, 此如小兒迷藏之戲; 你東邊來, 我即西邊去閃, 你西邊來, 我又東邊去避. 如此出沒, 何時是了邪?]” 하였다. 《朱子大全 48권 答呂子約》 |
[辯誨曰: “旣發, 便乘氣以行云云, 四端亦氣也.” 滉謂四端亦氣, 前後屢言之; 此又引朱子答弟子問之說, 固甚分曉. 然則公於孟子說四端處, 亦作氣之發看耶? 如作氣之發看, 則所謂仁之端義之端ㆍ仁義禮智四字, 當如何看耶? 如以些兒氣參看, 則非純天理之本然; 若作純天理看, 則其所發之端, 定非和泥帶水底物事. 公意以仁義禮智是未發時名, 故爲純理; 四端是已發後名, 非氣不行, 故亦爲氣耳. 愚謂四端雖云乘氣, 然孟子所指, 不在乘氣處, 只在純理發處, 故曰仁之端義之端, 而後賢亦曰: “剔撥而言善一邊爾.” 必若道兼氣言時, 已涉於泥水, 此等語言, 皆著不得矣. 古人以人乘馬出入, 比理乘氣而行, 正好. 蓋人非馬不出入, 馬非人失軌途, 人馬相須不相離. 人有指說此者, 或泛指而言其行, 則人馬皆在其中, 四七渾淪而言者, 是也; 或指言人行, 則不須并言馬, 而馬行在其中, 四端是也; 或指言馬行, 則不須并言人而人行在其中, 七情是也. 公見滉分別而言四七, 則每引渾淪言者以攻之, 是見人說人行馬行, 而力言人馬一也不可分說也; 見滉以氣發言七情, 則力言理發, 是見人說馬行, 而必曰人行也; 見滉以理發言四端, 則又力言氣發, 是見人說人行, 而必曰馬行也. 此正朱子所謂與迷藏之戲相似, 如何如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