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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을 위한 토론은 숨바꼭질 같은 것이다

문화도시인 2012. 1. 23. 21:01

토론을 위한 토론은 숨바꼭질 같은 것이다
  지식인들은 대개 말을 잘한다. 웬만큼 지식이 있고 책을 읽은 사람이면 갖가지 논리에 익숙해져 있어 대화에서 좀처럼 남에게 지지 않는다. 남의 말뜻은 다 알지 못해도 된다. 총론을 말하면 각론으로 맞서고 나무를 얘기하면 왜 숲을 못 보느냐고 따지면 그만이다. 그저 토론을 위한 토론인가. 대화하다 보면 참으로 덧없다는 생각에 허탈감마저 들 때도 있다. 두 사람이 토론하면서 이것을 얘기할 때는 함께 이것을 생각하고 저것을 얘기할 때는 함께 저것을 생각해야 쌍방의 견해가 평행선을 달리지 않고 난만동귀(爛漫同歸)하여 지당한 결론에 이를 수 있거늘 생각이 자꾸만 당장의 주제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들어 반전의 기회만 노린다면 성실한 대화 자세라 할 수 없다. 이러한 토론 문화는 현란한 말의 잔치만 벌여 놓고, 정작 그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말의 함정에 스스로 갇혀서 무병신음(無病呻吟)하듯이 속절없이 고뇌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대해 토론하면서 이쪽을 말하면 저쪽에 서고 저것을 말하면 이것으로 받는 고봉의 토론 자세를 두고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다고 지적하였다.

  변론에 “이미 발하면 리(理)가 기(氣)를 타고 운행하니……사단(四端)도 기(氣)이다.” 한 데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사단도 기(氣)라고 그 동안 누차 말하셨는데 여기서 또 인용하신 주자(朱子)가 제자의 물음에 답한 말이 매우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공은 맹자(孟子)가 말한 사단도 기(氣)가 발한 것으로 봅니까? 만약 기가 발한 것으로 본다면, 이른바 ‘인(仁)의 단서’ㆍ‘의(義)의 단서’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 네 글자는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기(氣)가 섞인 것으로 본다면 순수한 천리(天理)의 본연(本然)이 아닐 것이며, 순수한 천리로 본다면 그 발하는 단서는 틀림없이 진흙이 물에 섞인 상태처럼 기(氣)가 섞여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공은 인ㆍ의ㆍ예ㆍ지는 미발(未發)한 때의 명칭이므로 순수한 리(理)이고, 사단은 이발(已發)한 뒤의 명칭이라 기(氣)가 아니면 행해질 수 없으므로 사단 역시 기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생각건대, 사단도 비록 리(理)가 기를 타는 것이지만 맹자가 가리킨 바는 기를 타는 데 있지 않고 오직 순수한 리가 발하는 데에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의 단서’ㆍ‘의의 단서’라 하였고, 후대의 학자들도 맹자가 말한 사단에 대해 “정(情) 중에서 선(善)한 측면만 끄집어내어 말한 것이다.” 했던 것입니다. 만약 기를 개념 속에 넣어서 말하였다면 사단도 이미 진흙이 물에 섞이듯이 혼탁한 것이 될 터이니, 이러한 말들을 모두 붙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것으로 리(理)가 기(氣)를 타고 운행함을 비유한 고인(古人)의 설명이 참으로 좋습니다. 대개 사람은 말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하고 말은 사람이 아니면 길을 잃게 되니, 사람과 말이 서로 없어서는 안 되고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을 가리켜 말하는 사람이 혹 범범하게 전체를 가리켜서 간다고 말하면 사람과 말이 모두 그 가운데 있으니 사단과 칠정을 하나로 합쳐서 말하는 경우가 이것이고, 혹 사람이 가는 것만을 가리켜 말하면 굳이 말을 아울러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 가는 것은 그 가운데 있으니 사단이 이것이고, 혹 말이 가는 것만을 가리켜 말하면 굳이 사람을 아울러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가는 것은 그 가운데 있으니 칠정이 이것입니다.
  지금 공은 내가 사단ㆍ칠정을 둘로 나누어 말하는 것을 보면 언제나 하나로 합쳐서 말한 것을 인용하여 공박하니, 이는 남이 “사람이 가고 말이 간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사람과 말은 하나이니 나누어 말해서는 안 된다고 힘써 주장하는 격입니다. 또 내가 칠정을 기가 발한 것으로 말하면 리(理)가 발한 것이라고 힘써 주장하니 이는 남이 “말이 간다.”고 하는 말을 듣고 굳이 “사람이 간다.”고 하는 격이며, 내가 사단을 리가 발한 것이라고 말하면 또 기가 발한 것이라고 힘써 주장하니 이는 남이 “사람이 간다.”고 하는 말을 듣고 굳이 “말이 간다.”고 하는 격입니다. 이는 바로 주자(朱子)가 말한 ‘숨바꼭질[迷藏之戲]’과 같은 것1)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1) 주자(朱子)가…것 : 주자가 여자약(呂子約)에게 답한 편지에서 “대저 학문은 단지 두 갈래 길 뿐이니, 치지(致知)와 역행(力行)일 뿐입니다. 사람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먼저 공부의 차례에 따라 십분 힘을 쓰면 차츰 효과를 보게 되고, 그런 뒤에 또 어느 곳이 부족한지 알았으면 곧 이곳에 힘써 공부하는 것이 바로 바른 이치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이렇게 하려 하지 않고 남이 자기의 견해가 옳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도리어 수긍하지 않고 대뜸 ‘우선 내가 본원(本原)을 함양하고 힘써 실천할 때를 기다려라.’ 하니, 이는 마치 아이들의 숨바꼭질과 같습니다. 술래가 동쪽으로 오면 나는 서쪽으로 가서 숨고 술래가 서쪽으로 오면 나는 또 동쪽으로 가서 피하는 격입니다. 이와 같이 나왔다 숨었다 해서야 어느 때 끝나겠습니까?[大抵學問只有兩途, 致知力行而已. 在人須是先依次第, 十分著力, 節次見效了, 向後又看甚處欠闕, 即便於此更加功夫, 乃是正理. 今却不肯如此, 見人説著自家見處未是, 却不肯服, 便云且待我涵養本原, 勉强實履, 此如小兒迷藏之戲; 你東邊來, 我即西邊去閃, 你西邊來, 我又東邊去避. 如此出沒, 何時是了邪?]” 하였다. 《朱子大全 48권 答呂子約》

[辯誨曰: “旣發, 便乘氣以行云云, 四端亦氣也.”
滉謂四端亦氣, 前後屢言之; 此又引朱子答弟子問之說, 固甚分曉. 然則公於孟子說四端處, 亦作氣之發看耶? 如作氣之發看, 則所謂仁之端義之端ㆍ仁義禮智四字, 當如何看耶? 如以些兒氣參看, 則非純天理之本然; 若作純天理看, 則其所發之端, 定非和泥帶水底物事. 公意以仁義禮智是未發時名, 故爲純理; 四端是已發後名, 非氣不行, 故亦爲氣耳. 愚謂四端雖云乘氣, 然孟子所指, 不在乘氣處, 只在純理發處, 故曰仁之端義之端, 而後賢亦曰: “剔撥而言善一邊爾.” 必若道兼氣言時, 已涉於泥水, 此等語言, 皆著不得矣. 古人以人乘馬出入, 比理乘氣而行, 正好. 蓋人非馬不出入, 馬非人失軌途, 人馬相須不相離. 人有指說此者, 或泛指而言其行, 則人馬皆在其中, 四七渾淪而言者, 是也; 或指言人行, 則不須并言馬, 而馬行在其中, 四端是也; 或指言馬行, 則不須并言人而人行在其中, 七情是也. 公見滉分別而言四七, 則每引渾淪言者以攻之, 是見人說人行馬行, 而力言人馬一也不可分說也; 見滉以氣發言七情, 則力言理發, 是見人說馬行, 而必曰人行也; 見滉以理發言四端, 則又力言氣發, 是見人說人行, 而必曰馬行也. 此正朱子所謂與迷藏之戲相似, 如何如何?]

          ▶ 16세기 후반 李正根(1531~?)이 그린 雪景山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황(李滉 1501~1570)
〈기명언에 답하다[答奇明彦]〉《퇴계집(退溪集)》

  성리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본체인 성(性)과 작용인 정(情)으로 나누어 본다. 성(性)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리(理)가 마음의 기(氣) 속에 들어 있는 상태에서 리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래서 정이천(程伊川)은 “성은 곧 리이다.[性卽理]”라 했으니, 이는 성의 상태에서는 기(氣)가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성의 개념에 기를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마음의 작용인 정(情)은 마음의 본체인 성(性)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성이라는 웅덩이에 고인 물이 흘러나온 것과 같고 전구의 빛이 발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정도 그 본연의 모습은 성의 리(理)가 유출하는 것이지만 정은 마음이 사물에 감촉하면서 기가 따라서 움직이므로 정의 개념에는 대개 기가 포함된다.

  칠정(七情)은 당연히 정이고, 사단(四端)도 정이다. 그러나 칠정은 《예기(禮記)》에 처음 보이는데 단속하고 제어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였고, 사단은 《맹자(孟子)》에 나오는데 확충(擴充)해야 할 단서로 말하였다. 칠정은 정이지만 그 개념을 기 쪽에 두었기 때문에 선(善)과 악(惡), 어느 쪽으로 흘러갈지 모르는 불안한 것으로 규정했고, 사단도 정이지만 리(理)와 기(氣)가 하나로 합쳐진 중에서 리 쪽에 그 개념을 두었기 때문에 선(善)한 측면만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단과 칠정은 다 같은 정인데 그 말이 나온 원전의 문맥을 살펴보면 개념은 각각 다르다. 고봉이 주장했듯이 사단도 칠정과 마찬가지로 리가 기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단의 경우에는 리가 발할 때에 기가 리를 장애하지 않기 때문에 기가 있어도 그 개념에 넣지 않았을 뿐이다.

  퇴계와 고봉은 토론을 벌이면서 사단과 칠정에 대해 두 사람 모두 “나아가 말한 바가 다르다.[所就而言之者不同]”고 하였다. 이 말은 사단과 칠정은 내용은 같고 취지만 다르다는 뜻인데, 두 사람은 상반된 의미로 사용하였다. 고봉은 사단과 칠정은 말만 다를 뿐 내용은 똑 같은 정인데 다르다고 하면 사단과 칠정 두 가지 정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처럼 오인될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반면에 퇴계는 사단과 칠정이 다 정이지만 그 말의 취지는 각각 다르니, 그 개념을 달리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퇴계는, 이를테면 흰 돌에서 흰색과 단단한 형질을 나눌 수 없지만 희다고 할 수도 있고 단단하다고 할 수 있듯이 사단의 개념도 리와 기가 합일한 상태에서 리만 도출한 것이라 생각했다. “정(情) 중에서 선(善)한 측면만 끄집어내어 말한 것이다.”고 한 말과 같은 뜻이다.

  두 사람의 토론을 보면, 고봉은 내용을 중시하여 사단과 칠정은 말만 다를 뿐 실상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퇴계는 개념을 중시하여 내용은 같더라도 개념이 다르므로 같음을 전제한 위에서 다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모습을 가지고 리와 기의 관계를 비유한 것은 주자(朱子)의 설명이다. 사람이 말을 타고 갈 때 사람이 간다고 할 수도 있고 말이 간다고 할 수도 있다. 사람은 말 위에 가만히 앉아 움직이지 않아도 우리는 사람이 간다고 한다. 실제로 움직여서 가는 것은 말이므로 말이 간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말을 타고 서울로 갈 때 대개 말이 서울로 간다고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리발(理發), 즉 리가 발한다는 것이니, 리는 발함이 없이 발하는 것이다. 리는 사물이 아니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고 겉으로는 기가 움직이지만 그 내용은 리가 움직이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리 없는 기가 없고 기 없는 리가 없어서 리와 기는 항상 상수적(相須的)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전체만 보기도 하고 부분만 보기도 한다. 때로는 어느 한 쪽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것들은 모두 무시해야 할 때도 있다. 예컨대 아름다운 강의 경치를 볼 때 가장 먼저 전체를 한 눈에 담아서 아름답다고 느끼고, 그런 다음에 잔잔히 흐르는 강물이며 유유히 헤엄치는 흰 해오라기며 강 가에 선 버드나무 등을 한 부분씩 뜯어서 본다. 이렇듯 전체도 보고 부분도 보아 사물의 정추(精粗)와 본말(本末)을 다 알아야 참으로 눈 밝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전체를 본다고 해서 부분이 어디로 달아나는 게 아니고 부분을 본다고 해서 전체가 없어지는 게 아니니, 전체를 볼 때 부분을 못 볼까 지레 걱정하고 부분을 볼 때 전체를 못 볼까 미리 염려하여 전체를 볼 때는 부분에 얽매이고 부분을 볼 때는 전체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전체만 파악하고 부분을 무시하거나 부분에 집착해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될 뿐이다. 전체를 봐야 할 때는 전체를 보고 부분을 봐야 할 때는 부분을 보아 능소능대(能小能大)하는 사고의 원활한 전환이 없으면, 널빤지를 등에 짊어진 사람처럼 늘 한 쪽만 바라보는, 소견이 꽉 막힌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