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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학(新史學)을 읽고 구사학(舊史學)을 논하다

문화도시인 2011. 10. 24. 09:04

신사학(新史學)을 읽고 구사학(舊史學)을 논하다

  "아빠, 역사가 무어에요?" 작년 이맘 때 다섯 살 꼬마의 은근한 질문이었다. 책상 위에는 E.H.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놓여 있었다. 어떻게 하나. "예전에 우리 시민의 숲에 갔었지?" "응." "예전에 우리 과학관에 갔었지?" "응." "그게 역사야." "응? 그럼, 예전에 푸르지오에서 살았던 것도 역사에요?" "그래." 겨우 위기를 모면했지만 올바른 대답이었을 리 없다. 정말 역사란 무엇일까? 자격지심이 들어 서가를 보니 서양 학자들의 책만 눈에 띄었다. 이상하다. 우리나라 선인들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왜 우리는 우리나라 선인들이 생각한 『역사란 무엇인가』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일까? 그런 생각으로 틈틈이 자료를 읽다가 문득 경상도 청도 유학자 박장현(朴章鉉 1908~1940)의 글, 「구사학론(舊史學論)」과 만나게 되었다. 이 글은 청말의 사상가 양계초(梁啓超 1873~1929)의 「신사학(新史學)」을 읽고 조선의 구사학을 논한 것이다. 과연 박장현의 마음 속에 역사란 무엇이었을까?

  사학(史學)은 국민의 밝은 거울이다. 사상(思想) 진보(進步)의 원천이다.1) 빠져서는 아니되는 학문의 일부분이다. 오늘날 유럽 민족이 늘 진보한 것은 사학의 공이 절반이다.2) 우리 나라가 이다지도 어리석은 것은 사학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역대사(歷代史)를 살펴 보면 위로 김부식의 『삼국사기』, 정인지의 『고려사』, 서거정의 『동국통감』부터 아래로 『국조보감』 및 현재 국내에 돌아다니는 야사까지 수십 종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거의 모두 진부한 것을 서로 이어 받아 사학계가 혁신되어 사학의 공덕이 국민에게 미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4천 년은 된다.3) 문제의 근원을 찾으면 두 가지가 있다.

1) 梁啓超는 "사학은 가장 방대하고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국민의 밝은 거울이며 애국심의 원천이다"라고 했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1
2) 梁啓超는 "오늘날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발달하고 열국이 날로 문명이 진보하는 것은 사학의 공이 절반이다."라고 했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1
3) 梁啓超는 "능히 史界를 위해 신천지를 개척하여 이 학문(=사학)의 공덕이 국민에게 보급되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라고 했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2


  첫째, 사실은 알아도 이상(理想)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40여 종의 원질이 합쳐 형성되었다. 하지만 40여 종의 원질을 채집해서 눈, 귀, 코, 입, 심장, 폐부, 살갗, 털, 뼈마디를 모두 구비해도 정신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역사의 정신은 무엇인가? 이상이 그것이다.4) 서양 학자 스펜서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이웃집 고양이가 어제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면 사실이야 참으로 사실이지만 그것이 쓸 데 없는 사실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일과 조금도 관계가 없어서 민족 생활상으로 조금도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미루어 역사를 읽는 공례를 보겠다. "○○일 일식이 있었다." "○○일 지진이 있었다." "○○일 태자를 책봉했다." "○○일 비빈을 책봉했다." "○○일 대신 아무개가 죽었다." "○○일 어떤 교서가 내려졌다." 종이에 가득찬 것이 모두 이웃집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사실과 같아 왕왕 책 한 권을 다 읽어도 한 마디 말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니 얼마나 지겨울까?5) 이른바 이상이라는 것은 거기에 인군(人羣)도 있고 시대(時代)도 있다. 인군(人羣)이 서로 마주하고 시대가 서로 이어질 때 혹은 그 원인(遠因)을 말하고 혹은 그 근인(近因)을 말하며 기왕의 큰 공례를 비추어 장래의 풍조를 보여 주고 사건 갑의 영향을 기록하여 사건 을에 유익한 연후에야 민지(民智)를 늘리는 책이 될 것이고 민지를 없애는 도구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6)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를 다스리고자 해도 착수할 곳이 없다는 개탄이 없을 수 없다.

4) 梁啓超는 "넷째, 사실은 알아도 이상(理想)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40여 종의 원질이 합쳐 형성되었다. 눈, 귀, 코, 혀, 손, 발, 장부, 살갗, 털, 근육, 뼈마디, 혈관을 합쳐 형성되었다. 그러나, 40여종의 원질을 채집해 눈, 귀, 코, 혀, 손, 발, 장부, 살갗, 털, 근육, 뼈마디, 혈관을 모두 구비해도 이와 같은 것을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필시 불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정신은 무엇인가? 이상이 그것이다."라고 했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4
5) 梁啓超는 "영국 학자 스펜서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이웃집 고양이가 어제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면 사실이야 참으로 사실이지만 그것이 쓸 데 없는 사실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어째서인가? 그것이 다른 일과 조금도 관계가 없어서 우리 생활상의 행위에 조금도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상의 사적 중엔 이와 같은 것이 정히 많다. 이 관례를 미루어 독서하고 만물을 본다면 생각이 과반은 될 것이다." 이것이 스펜서씨가 역사를 짓고 역사를 읽는 방식을 가르쳤던 것이다. 태서의 구사가(舊史家)도 본디 이것을 면하지 못했지만 중국은 더욱 심하다. "○○일 일식이 있었다." "○○일 지진이 있었다." "○○일 황자(皇子)를 책봉했다." "○○일 대신 아무개가 죽었다." "○○일 어떤 조서(詔書)가 내려졌다." 종이에 가득찬 것이 모두 이웃집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사실과 같아 왕왕 책 한 권을 다 읽어도 한 마디 말도 머릿속에 들어올 만한 가치가 없다... (中略) 실은 중요한 일은 다 빼고 이웃집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일과 같은 것만 남겼으니 얼마나 지겨울까?"라고 했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5
6)梁啓超는 "군(羣)과 군(羣)이 서로 마주하고 시대와 시대가 서로 이어짐에 그 사이에 소식이 있고 원리가 있다. 역사책을 짓는 사람이 참으로 능히 이를 간파하여 저러한 원인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알아 기왕의 큰 공례를 비추어 장래의 풍조를 보여 준 연후에야 그 책이 세계에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지금 중국 역사는 단지 "모일 사건 갑이 있었다. 모일 사건 을이 있었다."라고만 말하고 이 사건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원인이 어디에 있고 그 근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말을 못 한다. 그 사건이 다른 사건 혹은 다른 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좋은 결과를 얻었는지 나쁜 결과를 얻었는지 말을 못 한다...(中略)... 중국사는 민지(民智)를 늘리는 도구가 아니라 민지를 없애는 도구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4


  둘째, 조가(朝家)는 알아도 민간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항상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역사가 아니라 세 가문의 집안 족보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조금 과당한 것 같지만, 역사책을 지은 사람의 정신을 생각하면 실제로 틀림이 없다.7) 무릇 책을 지음에 종지를 귀하게 여긴다. 전에 역사책을 지은 사람은 조가(朝家)를 위해 계보를 정리했는가? 약간의 대신을 위해 기념비를 지었는가? 약간의 과거사를 위해 가무극을 만들었는가? 아니다. 후세에 거울로 삼아 권면하고 징계하기 위함이다.8) 이 때문에 권면하고 징계할만한 민간의 사건을 채집하여 역사의 재료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영웅의 무대이다. 영웅이 아니면 거의 역사가 없다. 따라서, 인물을 시대의 대표로 삼아 하나의 인군(人羣)이 휴양하고 생식하고 한몸으로 진화한 모습을 지어 후세에 독자가 거기에서 흥기하고 진보하게 하려는 것이다.9) 전에 역사가는 역사를 조가(朝家)의 전유물이라 여기고 조가가 아니면 기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때때로 야사의 서술에 의지해 편린을 볼 수도 있지만 백에 하나도 얻지 못한다. 이것이 민기(民氣)와 학풍이 날로 쇠패한 까닭이다. 시 삼백 편이 주가(周家)의 역사인데 민풍(民風)이 그 절반이니 옛날 역사책도 그렇지 않던가? 우리나라가 민족사상(民族思想)이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역사가가 그 잘못을 피할 수 있을까?10)

7) 梁啓超는 "첫째, 조정은 알아도 국가는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항상 "이십사사(二十四史)는 역사가 아니다. 스물 네 가지 성씨의 집안 족보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이 조금 과당한 것 같지만 역사책을 지은 사람의 정신을 살펴 보면 실제로 틀림 없다."라고 하였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3
8) 梁啓超는 "셋째, 낡은 사적은 알아도 오늘날의 일은 모른다는 것이다. 무릇 책을 지음에 종지를 귀하게 여긴다. 역사책을 지은 사람은 낡은 죽은 사람을 위해 기념비를 지으려는 것인가? 약간의 과거사를 위해 가무극을 만들려는 것인가? 아니다. 장차 지금 세상 사람이 감계하고 재단하여 경세(經世)의 응용으로 삼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3
9) 梁啓超는 "둘째, 개인은 알아도 군체(羣體)는 모른다는 것이다. 역사는 영웅의 무대이다. 영웅이 아니면 거의 역사가 없다. 태서의 훌륭한 역사가도 어찌 인물을 치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역사를 잘 짓는 사람은 인물을 역사의 재료로 삼지 역사를 인물의 화상(畵像)으로 삼는다고 들어 보지 못했으며 인물을 시대의 대표로 삼지 시대를 인물의 부속으로 삼는다고 들어 보지 못했다...(中略)... 역사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의 인군(人羣)이 서로 교섭하고 서로 경쟁하고 단결하는 방도를 능히 서술하고 하나의 인군(人羣)이 휴양하고 생식하고 한몸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능히 서술하여 훗날 독자가 군(羣)을 사랑하고 군(羣)을 위해 잘하려는 마음이 피어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3
10) 梁啓超는 "우리 중국의 국가사상이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수천년 역사가가 어찌 그 잘못을 피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3


  오늘날 민족주의를 제창해서 우리 동포가 능히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세계에 일어서게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사학 한 분과는 실로 노소, 남녀,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모두가 종사해서 목말라 물마시듯 굶주려 밥을 먹듯 한 순간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수천 년간을 거쳐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길러 주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제공하는 역사책이 거의 하나도 없었다. 오호! 사계혁명(史界革命)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끝내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유유만사(悠悠萬事) 중에 이것이 중대하다. 「신사학(新史學)」을 지은 것이 어찌 호사가의 일이겠는가? 마지 못해 그런 것일 뿐이다.11)

11) 梁啓超는 "오늘날 민족주의를 제창해서 우리 4억 동포가 능히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세계에 강하게 일어서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학 한 분과는 실로 노소, 남녀, 지우(智愚), 현불초(賢不肖)를 막론하고 모두가 종사해서 목말라 물마시듯 굶주려 밥을 먹듯 한 순간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문서고에 있는 수천만 권의 저술을 두루 보아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길러 주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제공하는 자격이 있는 역사책이 거의 하나도 없다. 오호! 사계혁명(史界革命)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끝내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유유만사(悠悠萬事) 중에 이것이 중대하다. 내가 「신사학(新史學)」을 지은 것이 어찌 남과 다르기를 좋아해서이겠는가? 마지 못해 그런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7

- 박장현(朴章鉉) 「구사학론(舊史學論)」
                         『문경상초(文卿常草)』 (『中山全書』下)

※ 원문은 홈페이지 > 고전포럼 > 고전의향기 에서 서비스 될 예정입니다.

 

    ▶ 박장현이 언급한 문제의 사서들(왼쪽부터 삼국사기, 고려사, 동국통감, 국조보감)

  역사학은 어렵다. 세월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보니 세월을 아는 나이가 되어야 한다. 10대에는 역사학을 꿈꾸었다 할지라도 문학 소년/소녀의 감수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일이 많다. 과거를 향한 주관적인 애증에 도취되어 그것을 역사학의 열정으로 생각하는 때가 이 시절이 아닐까? 20대에는 역사학을 수련했다 할지라도 문헌을 읽는 훈련에서 그치는 일이 많다. 문헌에 대한 객관적인 실증에 매몰되어 그것을 역사학의 전부로 생각하는 때가 이 시절이 아닐까? 아직 세월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시절에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는 근본적인 물음이 결여되어 있다. 초학의 세계에서 역사학은 문학 또는 문헌학과 구별되지 못한다.

  세월을 알아도 역사학은 어렵다. 세월은 역사의 바탕이지만 세월 그 자체가 역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세월이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세월을 시대로 인식하는 역사적인 사유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월과 시대는 다르다. 세월은 여류(如流)하나 시대는 변화한다. 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질서를 통찰할 수 있고 변하지 않는 질서 속에서도 끝내 변화를 촉발하는 에너지를 통찰할 수 있다. 시대에 내재하는 불변의 질서와 변화의 에너지를 통찰하는 역사적인 감각은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러한 감각으로 던지는 근본적인 물음이 곧 "역사란 무엇인가"가 아닐까? 그리고, 비동시적인 역사적 감각이 동시적으로 경합하는 지점에서 신사학과 구사학의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양계초의 「신사학」을 읽고 조선의 구사학을 논한 박장현은 불꽃 같은 생애를 보낸 학자였다. 그는 고향 청도에서 구학과 신학을 모두 배우고 시흥과 도쿄에서 한학을 공부한 이색적인 학자였고, 중국의 진환장(陳煥章)․하성길(夏成吉), 일본의 산전준(山田準)․내전주평(內田周平) 등과 교류한 동아시아의 학인이었다. 『해동춘추(海東春秋)』․『해동서경(海東書經)』․『동국사안(東國史案)』․『조선사초(朝鮮史草)』․『야사(野史)』 등의 작품에서 보듯 한국사에 학문적 열정을 쏟아 부었던 1930년대의 역사가였다.

  역사가로서 박장현은 조선의 구사학의 문제점을 간단히 이렇게 말했다. "구사학은 사실만 알고 이상(理想)은 모른다, 구사학은 조가(朝家)만 알고 민간은 모른다, 그래서 조선에서 민족사상이 발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양계초는 이렇게 말했다. "구사학은 사실만 알고 이상은 모른다, 구사학은 조정만 알고 국가는 모른다, 그래서 중국에서 국가사상이 발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양계초와 조금 다르게 박장현은 국가보다 민간과 민족을 중시했다.

  박장현이 생각한 한국사는 민족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민족사였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이 그대로 민족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식민지 조선을 민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관이 필요했다. 민족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개별 사실들을 민족의 사실로 통합할 수 있는 '이상'의 뒤편에 있었다. 민족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조정을 장악한 식민지 권력의 바깥에 남아 있는 '민간' 속에 있었다. 역사란 '이상'과 '민간'에서 발견한 민족의 세월이요, 민족의 이야기였다.

  여기서 잠깐, '민간'이라. 설령 민수주의(民粹主義)까지는 아니라 해도 민족이 사는 역사적 공간으로 '민간'의 심성적 지형이 부각된 것이 흥미롭다. 그러고 보니, 식민지 시기에 주목받은 조선의 민족사적 인물들은 상당수 '민간' 속에 살면서 '조가(朝家)'에 고통받고 조가를 꾸짖고 조가와 대결하는 것처럼 나온다. 허생은 '민간=남산'의 경세가로, 임꺽정은 '민간=청석골'의 의적으로, 정약용은 '민간=강진'의 대학자로 그려졌다. 하지만, 실제로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형성된 '민간'의 심성 지리와 만난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