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학(新史學)을 읽고 구사학(舊史學)을 논하다
신사학(新史學)을 읽고 구사학(舊史學)을 논하다 |
"아빠, 역사가 무어에요?" 작년 이맘 때 다섯 살 꼬마의 은근한 질문이었다. 책상 위에는 E.H.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놓여 있었다. 어떻게 하나. "예전에 우리 시민의 숲에 갔었지?" "응." "예전에 우리 과학관에 갔었지?" "응." "그게 역사야." "응? 그럼, 예전에 푸르지오에서 살았던 것도 역사에요?" "그래." 겨우 위기를 모면했지만 올바른 대답이었을 리 없다. 정말 역사란 무엇일까? 자격지심이 들어 서가를 보니 서양 학자들의 책만 눈에 띄었다. 이상하다. 우리나라 선인들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왜 우리는 우리나라 선인들이 생각한 『역사란 무엇인가』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일까? 그런 생각으로 틈틈이 자료를 읽다가 문득 경상도 청도 유학자 박장현(朴章鉉 1908~1940)의 글, 「구사학론(舊史學論)」과 만나게 되었다. 이 글은 청말의 사상가 양계초(梁啓超 1873~1929)의 「신사학(新史學)」을 읽고 조선의 구사학을 논한 것이다. 과연 박장현의 마음 속에 역사란 무엇이었을까? |
사학(史學)은 국민의 밝은 거울이다. 사상(思想) 진보(進步)의 원천이다.1) 빠져서는 아니되는 학문의 일부분이다. 오늘날 유럽 민족이 늘 진보한 것은 사학의 공이 절반이다.2) 우리 나라가 이다지도 어리석은 것은 사학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역대사(歷代史)를 살펴 보면 위로 김부식의 『삼국사기』, 정인지의 『고려사』, 서거정의 『동국통감』부터 아래로 『국조보감』 및 현재 국내에 돌아다니는 야사까지 수십 종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거의 모두 진부한 것을 서로 이어 받아 사학계가 혁신되어 사학의 공덕이 국민에게 미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4천 년은 된다.3) 문제의 근원을 찾으면 두 가지가 있다. 1) 梁啓超는 "사학은 가장 방대하고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국민의 밝은 거울이며 애국심의 원천이다"라고 했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1 첫째, 사실은 알아도 이상(理想)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40여 종의 원질이 합쳐 형성되었다. 하지만 40여 종의 원질을 채집해서 눈, 귀, 코, 입, 심장, 폐부, 살갗, 털, 뼈마디를 모두 구비해도 정신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역사의 정신은 무엇인가? 이상이 그것이다.4) 서양 학자 스펜서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이웃집 고양이가 어제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면 사실이야 참으로 사실이지만 그것이 쓸 데 없는 사실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일과 조금도 관계가 없어서 민족 생활상으로 조금도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미루어 역사를 읽는 공례를 보겠다. "○○일 일식이 있었다." "○○일 지진이 있었다." "○○일 태자를 책봉했다." "○○일 비빈을 책봉했다." "○○일 대신 아무개가 죽었다." "○○일 어떤 교서가 내려졌다." 종이에 가득찬 것이 모두 이웃집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사실과 같아 왕왕 책 한 권을 다 읽어도 한 마디 말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니 얼마나 지겨울까?5) 이른바 이상이라는 것은 거기에 인군(人羣)도 있고 시대(時代)도 있다. 인군(人羣)이 서로 마주하고 시대가 서로 이어질 때 혹은 그 원인(遠因)을 말하고 혹은 그 근인(近因)을 말하며 기왕의 큰 공례를 비추어 장래의 풍조를 보여 주고 사건 갑의 영향을 기록하여 사건 을에 유익한 연후에야 민지(民智)를 늘리는 책이 될 것이고 민지를 없애는 도구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6)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를 다스리고자 해도 착수할 곳이 없다는 개탄이 없을 수 없다. 4) 梁啓超는 "넷째, 사실은 알아도 이상(理想)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40여 종의 원질이 합쳐 형성되었다. 눈, 귀, 코, 혀, 손, 발, 장부, 살갗, 털, 근육, 뼈마디, 혈관을 합쳐 형성되었다. 그러나, 40여종의 원질을 채집해 눈, 귀, 코, 혀, 손, 발, 장부, 살갗, 털, 근육, 뼈마디, 혈관을 모두 구비해도 이와 같은 것을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필시 불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정신은 무엇인가? 이상이 그것이다."라고 했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4 둘째, 조가(朝家)는 알아도 민간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항상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역사가 아니라 세 가문의 집안 족보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조금 과당한 것 같지만, 역사책을 지은 사람의 정신을 생각하면 실제로 틀림이 없다.7) 무릇 책을 지음에 종지를 귀하게 여긴다. 전에 역사책을 지은 사람은 조가(朝家)를 위해 계보를 정리했는가? 약간의 대신을 위해 기념비를 지었는가? 약간의 과거사를 위해 가무극을 만들었는가? 아니다. 후세에 거울로 삼아 권면하고 징계하기 위함이다.8) 이 때문에 권면하고 징계할만한 민간의 사건을 채집하여 역사의 재료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영웅의 무대이다. 영웅이 아니면 거의 역사가 없다. 따라서, 인물을 시대의 대표로 삼아 하나의 인군(人羣)이 휴양하고 생식하고 한몸으로 진화한 모습을 지어 후세에 독자가 거기에서 흥기하고 진보하게 하려는 것이다.9) 전에 역사가는 역사를 조가(朝家)의 전유물이라 여기고 조가가 아니면 기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때때로 야사의 서술에 의지해 편린을 볼 수도 있지만 백에 하나도 얻지 못한다. 이것이 민기(民氣)와 학풍이 날로 쇠패한 까닭이다. 시 삼백 편이 주가(周家)의 역사인데 민풍(民風)이 그 절반이니 옛날 역사책도 그렇지 않던가? 우리나라가 민족사상(民族思想)이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역사가가 그 잘못을 피할 수 있을까?10) 7) 梁啓超는 "첫째, 조정은 알아도 국가는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항상 "이십사사(二十四史)는 역사가 아니다. 스물 네 가지 성씨의 집안 족보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이 조금 과당한 것 같지만 역사책을 지은 사람의 정신을 살펴 보면 실제로 틀림 없다."라고 하였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3 오늘날 민족주의를 제창해서 우리 동포가 능히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세계에 일어서게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사학 한 분과는 실로 노소, 남녀,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모두가 종사해서 목말라 물마시듯 굶주려 밥을 먹듯 한 순간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수천 년간을 거쳐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길러 주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제공하는 역사책이 거의 하나도 없었다. 오호! 사계혁명(史界革命)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끝내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유유만사(悠悠萬事) 중에 이것이 중대하다. 「신사학(新史學)」을 지은 것이 어찌 호사가의 일이겠는가? 마지 못해 그런 것일 뿐이다.11) 11) 梁啓超는 "오늘날 민족주의를 제창해서 우리 4억 동포가 능히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세계에 강하게 일어서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학 한 분과는 실로 노소, 남녀, 지우(智愚), 현불초(賢不肖)를 막론하고 모두가 종사해서 목말라 물마시듯 굶주려 밥을 먹듯 한 순간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문서고에 있는 수천만 권의 저술을 두루 보아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길러 주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제공하는 자격이 있는 역사책이 거의 하나도 없다. 오호! 사계혁명(史界革命)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끝내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유유만사(悠悠萬事) 중에 이것이 중대하다. 내가 「신사학(新史學)」을 지은 것이 어찌 남과 다르기를 좋아해서이겠는가? 마지 못해 그런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飮氷室文集』9, 「新史學」p.7 |
- 박장현(朴章鉉) 「구사학론(舊史學論)」 |
※ 원문은 홈페이지 > 고전포럼 > 고전의향기 에서 서비스 될 예정입니다. |
▶ 박장현이 언급한 문제의 사서들(왼쪽부터 삼국사기, 고려사, 동국통감, 국조보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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